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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론

고난과 섭리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6. 02:41

(1)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최악의 순간들도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계신다. 그 순간들은 우주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나셨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셨다고 느끼더라도 당신이 그 분께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은 당신의 삶에 이전보다 더 큰 행복을 주시기 위한 기반을 닦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끝없는 변명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상황이지만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는 적어도 세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흔들림 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① 하나님이 계신다. ②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③ 그리고 하나님이 그녀를 치셨다. …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만물이 "모든 일을 그의 뜻대로 결정하시는 이의 계획"(엡 1:11)에 따라 일한다. …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당신 일생 동안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당신은 룻처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격렬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당신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이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 능력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포기하지 않을 자유와 용기를 얻을 수 있다. … 우리의 소망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가치에 호소하면, 그 분의 영광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온 마음을 다해 우리를 보호하시고 행복하게 해 주실 것이다. …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 분의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이름의 가치를 높이시기 위함이다. …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확신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픔을 주신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위로가 된다. 우리의 아픔 뒤에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전능하신 목적이 감춰져 있다. …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우리 삶의 아픔과 즐거움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극히 유익하다는 것이다. …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정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픔이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임을 흔들림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 우울증의 가장 나쁜 점 중의 하나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목적과 희망을 품고 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 우리가 서로 "하나님을 바라도록" 도와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 하나님을 바라는 가족, 하나님을 바라는 교회만이 계획과 전략을 세우기 때문이다. …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손길의 역사하심을 깨닫기 시작하면, 소망이 살아나게 되고 단순히 악을 회피하는 의로움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의로움이 살아난다. [존 파이퍼, 『하나님의 섭리』, pp.25, 29, 43, 52, 55, 58 ~ 59, 76 ~ 77, 93 ~ 94, 162 ~ 163]


(2)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현명하고 공정하게(sapienter et iuste) 행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 일이 왜 그렇게 행해졌는지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종종 알지 못하지만 경건한 사람이라면 모두 그것을 믿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숨겨진 계획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지(concedere)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을 지나치게 평가하는 것이다. [존 칼빈,『기독교강요2』, 기독교문사 刊, p.392]

(3)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상황을 맞을 때가 있다. 인생의 배는 침몰해 가는데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신 것만 같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지 모르겠다. 제자들은 투정을 부렸다.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미리 막으셨어야죠.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해 주셔야죠.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애초에 저희를 이런 위험에 빠뜨리지 마셨어야죠. 풍랑을 잠재운 뒤 예수님이 "아이고, 많이 놀랐겠구나!"라며 제자들의 등을 다독거리셨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라고 꾸짖으셨다. 제자들의 벙벙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왜냐고요? 왜 무서워했느냐고요? 배가 가라앉아 죽게 생겼는데 무서워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예수님이 저희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아 두려웠어요. 저희를 사랑하신다면 상황이 이렇게 되도록 놔두실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 이면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다. "너희의 전제가 틀렸다. 너희가 더 잘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자들이 폭풍을 통과하도록 허용한다. 너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 예수님도 통제할 수 없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계획이나 논리에 따라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시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힘만 무한한 것이 아니라 지혜와 사랑도 무한한 분이다.
  …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과 아울러 사랑을 제대로 알았다면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사랑한다면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생각이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나쁜 일을 허락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상황을 꿰뚫어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위대하고 강력한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멈추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티모시 켈러,『왕의 십자가』, pp. 96 ~ 98]

(4) 우리는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 때로 의로움을 위해, 혹은 어리석음 때문에, 타락한 세상에 그저 살고 있기 때문에 고통당한다. 고통과 죽음은 하나님께서 바르게 만드신 모든 것을 뒤틀어 버리고, 지혜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휘어 버리며, 아름다운 모든 것을 흩트러 버린다.
  … 고통의 경험 자체는 우리로 하여금 이 주제에 대한 전문가가 되게 하지 않는다. 오직 훈련만이 바른 자세를 만들어 준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시험을 만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시험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며 발버둥치게 만들지 않는다.
  … 다양한 시험들은 우리의 양심을 향해, 우리의 희망과 꿈을 향해, 삶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향해, 하나님과 그분의 목적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향해 다가온다. 비록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신은 줄어 들지라도, 우리를 자신의 손안에 붙들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더욱 커져 가게 한다. 우리가 겪는 시험들은 우리의 삶과 신앙에 진정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마이클 호튼,『약함의 자리』]

(5) 최후의 심판의 지연과 전쟁, 질병, 폭력, 불의, 고통으로부터의 궁극적 안식의 지연은 단순히 통화 대기 중에 나오는 배경음악이 아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두시는 생산적인 기간이다.
  … 우리는 실용적이고 즉각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것들만 가치 있게 여기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생각과 확신은 그 유용성에 의해 판단된다. 그것이 내가 자녀들을 키우는 데, 성공적인 결혼 생활에, 건강한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될까?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확신이 효용성이 없어 보일 때면 우리는 쉽게 다른 상품으로 옮겨 간다. 이런 문화는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때, 그들에게는 '예수 안에서의 승리'가 약속된다. 사람들은 웃으며 그들이 과거 얼마나 불행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행복에 겨워 둥둥 떠다니고 있는지에 대해 간증하곤 한다. 깨진 결혼 생활이 새롭게 되고, 고집스럽던 자녀들이 좁고 곧은 길로 돌아오며, 우울증이 사라졌다고 선언한다.
  … 고통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이유가 되기 보다는 개인적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여겨지기 쉬운데,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에 더욱 그렇다.
  … 고통은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모습, 갈구하는 삶의 모습,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고 그렇게 보여졌으면 하는 치장된 모습을 연출할 뿐이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의 몸이 늙어 가고 있으며, 우리의 카리스마는 점진적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력은 쇠퇴해 가고, 하찮은 일과 급한 일들에 종종 마음이 산만해진다. 우리의 영혼은 점점 빈약해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히 그를 즐거워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허영의 시장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무언가 새로운 것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 삶의 모든 것을 바꾸어 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우리는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서로를 쳐다보고, 과연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삶을 채워 줄 수 있을까 의심한다.
  … 이것은 우리가 '평화롭고 편안한 감정'을 가질 가능성이 가장 낮은 시련의 시기에 특히 중요한 점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에 더하여,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거나 혹은 우리 편에 서지 않으신다는 경험(혹은 경험의 부재)의 부담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무한한 위로는, 하나님이 매일 달라지는 우리의 영적 상태에 상관없이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 고난의 시기에 인류가 하나님께 항의하는 지속적인 두 가지 고발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하실 수 없거나 구하기 싫어하신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주권이나 그의 선하심 둘 중에 하나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여기서 우리는 기존의 난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하나님은 만사를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면서(고치실 수 있고), 동시에 또한 선한 분이신가(기꺼이 고치려고 하시는가)? 만일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는 틀린 가정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밀한 지혜의 권한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거나 혹은 이를 철회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주어진 은혜를 철회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떤 교만함이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다. [마이클 호튼,『약함의 자리』, pp.108, 146, 162 ~ 163, 173 ~ 174, 215, 229, 236]


(6) 우리가 겪은 최상의 경험과 최악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의외로 두 가지 경험이 서로 겹칠 때가 많다. 낸시 거스리(Nancy Guthrie)의 책을 보면, 한 강연자가 사람들에게 종이 한 장을 반으로 접게 했다. 그런 다음, 종이 위쪽에는 최악의 경험들을 적게 하고 아래에는 최상의 경험들을 적게 했다. 모든 사람들이 쓰고 나서 보니 종이 위와 아래에 동시에 쓴 경험들이 의외로 많았다. 사람들이 최악의 경험으로 생각했던 일이 훗날 최상의 경험으로 바뀐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고통스럽고 힘든 인생 경험을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유익하게 사용하신다는 증거다.

  나도 직접 종이 위에 적어 보니 똑같은 결과가 나왔다. 최악의 경험이 최상의 경험으로 바뀐 경우가 많았다. 당신도 한 번 해 보라. 최악이 최상으로 바뀐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나님이 사랑이신 동시에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최악과 최상이 겹치는 것은 악과 고통이 좋은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위대한 선을 이루신다는 확실한 증거다. 따라서 우리 눈에는 고통의 의미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 눈에는 보인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언젠가 우리 눈에도 보일 것이다. 하나님이 당장 고통을 없애시지 않아도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거나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허락하시든 거기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다. 맬컴 머거리지(Malcolm Muggeridge)는 긴 인생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당시에는 너무 절망스럽고 고통스럽던 경험들이 지금 돌아보니 뜻밖에도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다. 사실, 내가 이 세상에서의 75년 간 배운 모든 것, 내 존재를 진정으로 부유하게 하고 빛나게 만든 모든 것은 행복이 아닌 고통 속에서 배운 것이라도 더 없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랜디 알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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