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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론

하나님의 뜻 총정리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12. 7. 13:54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크게 5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하여 실제로 발생하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신 바를 의미한다(아래에서는 ‘①뜻’이라고 줄여 부르기로 하자). 이 뜻에 속하는 모든 사건은 실제로 빠짐없이 발생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항에 대하여 작정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이 없이 일어나는 사건은 없고, 하나님의 작정과 다르게 발생하는 사건도 없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은 ①뜻에 따른 것이고, ①뜻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①뜻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만 작정된다. 이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갖는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 도덕적 질서를 뜻한다(아래에서는 ‘②뜻’이라고 줄여 부르기로 하자).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①뜻 때문에 발생하고 또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지만, ②뜻과는 다르게 발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 도덕적 질서에 어긋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올바르다고 생각하시는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신 후에 인간들이 그에 따라 살 것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인간이 그것을 거스르길 원하는 경우에, 어떤 때는 그것을 허용하시고, 어떤 때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언제 이 두 가지를 다르게 다루시는지를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 허용하실 경우에는 ②뜻과 다른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 경우에도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경우에만 그 사건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사건의 발생은 ①뜻에는 합치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갖는 또 한 가지 의미는, 사람이 인생 경로 중에 만나게 되는 선택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선택하길 원하시는 선택지를 말한다(아래에서는 ③뜻이라고 줄여 부르기로 하자. ③뜻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활용 방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③뜻은 ②뜻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대개 우리가 궁금해 하는 부분은 ②뜻과 겹치지 않는 영역에 속하는 ③뜻이다(이것을 ④뜻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것을 선택하든 저것을 선택하든 죄가 되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아 보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택하길 원하시는 선택지가 바로 ④뜻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사실 ④뜻과 관련된 것이고, 어려운 문제도 ④뜻과 관련해서 발생한다. 이 ④뜻과 관련해서는 답해주어야 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1) 첫째는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④뜻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하는 점이다. (2) 둘째는 ④뜻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칠 경우, 우리가 갖는 모든 선택사항에 대해 ④뜻이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3) 셋째는 ④뜻이 존재하는 사항에 대해, 우리가 ④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 우리가 ④뜻과 다른 사항을 선택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탓하겠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씩 답해보자. (1) 먼저 ④뜻이라는 실체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조차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그냥 인간이 만들어 낸 개념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는 이런 것이 없을 수도 있다. (2) 또 ④뜻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 것인지 자체를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우리 일생의 모든 사항에 대해 ④뜻이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3) 그리고 만약 ④뜻이라는 것이 하나님께도 존재한다고 치고 또 문제되는 사황에 대해 ④뜻이 존재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이 무엇인지 인간이 알기 원하신다면, 그 사람에게 알게 하실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알기 어려운 ④뜻을 정해두시고, 그것을 인간이 알아 맞추길 원하신다고 보는 것은 이상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④뜻을 알 수 없을 경우에는 우리가 (존재하는지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④뜻과 다른 선택지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탓하지는 않으실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러한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살기를 원하신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가운데(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동기 가운데, 그리고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기를 원하는 선한 동기를 가진 가운데),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여 살면 충분하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라"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작정과 간섭과 개입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①뜻과 일치하는 것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하나님의 든든한 손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영광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의 선택이 발생하도록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가장 먼저 우리가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정말로 ④뜻의 영역에 속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②뜻에 속하는 사항은 아닌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②뜻은 우리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 삶의 선택의 도덕적인 일반 원칙들을 천명해 두셨기 때문이다. 그 확인 결과 우리가 궁금해 하는 하나님의 뜻이 ②뜻에 속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제 ④뜻의 문제가 된다. 이 경우에는 하나님께, ④뜻이 존재하고 또 우리가 그것을 알기 원하신다면, 그것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다면 우리는 그것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지 않으실 경우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④뜻에 따라 선택하도록 그리고 이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링컨은 자신이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설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특별히 배우자 선택과 직업 선택의 경우는 우리의 인생의 향방을 크게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인 만큼 많이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인간의 입장에서 할 일을 다 한 것이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보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동기 가운데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향을 우리의 역량 내에서 최대한 존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④뜻과 관련해서 우리가 선택을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요소들이 있다. 어떤 선택지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어떤 선택지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는가, 어떤 선택지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더 도움이 되겠는가가 그 요소들이다. (이것들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라면, 자신이 일단 구원받았는지, 그리스도인이기는 한 것인지부터 점검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이다.) 이것들을 고려하는 가운데 위와 같이 기도하며 한 가지를 선택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④뜻에 대해 그토록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그 동기를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④뜻에 합치하는 선택지를 선택할 경우, 그에 따른 삶을 사는 과정에서 불행과 고통, 역경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불행과 고통을 피하려는 동기에서 ④뜻을 알기 원하는 것이라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정말로 이런 동기 때문에 ④뜻을 알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러한 동기에서 ④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어떤 사항에 대해 ④뜻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치고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선택지를 선택함으로써 뒤따르게 되는 여러 역경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고통과 역경 가운데서도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우리는 고통과 고난을 피하려는 동기에서 ④뜻을 알기 원하는 것이 아니다. ④뜻이 존재할 경우 우리가 ④뜻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확신과 기쁨 그리고 떳떳함 가운데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또 우리의 인생에도 의미가 부여되고 우리 인생의 경로가 현재 어디쯤에 있는지 대충 감을 잡을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④뜻을 알기 원하는 것이다.


  ④뜻이 우리의 관심사인 또 다른 이유는, 선택이라는 문제 자체가 원래 인간에게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은 역설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발생하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는 바람에 고민하느라 힘들어 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더 좋은 것을 버리고 그보다 못한 것을 선택하는 실수를 할까봐 걱정한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데 그것을 내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자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복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든든한 손 안에 있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하나님의 작정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실 것이다. 단, 당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일 경우에 말이다.


  또 역시 ④뜻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가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지경에 대해 ④뜻을 갖지 않으실까봐 걱정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④뜻이 존재하는 개념이라면, 우리의 삶의 지경에 대해 하나님이 ④뜻을 가져주시기를 원해야 할까? ④뜻을 가져달라고 기도해야 할까? 아니다. 하나님이 먼저 ④뜻을 가지고 우리를 그 지경으로 인도하셨을 것이다. 물론 이 말이 그러니까 현재 하고 있는 직업이나 선택에 머무르라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갖는 다섯번째 의미는, 어떤 사건이 나에게 벌어졌을 때 그 사건이 나에게 벌어지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의도)을 말한다. (이것을 ⑤뜻이라 하자.) 하나님이 우리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하고 섭리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말이 우리 편에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⑤뜻을 알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삶의 각 국면에서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하나님의 ⑤뜻을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킨다. (자신의 이기적인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또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기 위해 어떤 것이 하나님의 ⑤뜻이라고 스스로를 속여가며 많은 상식밖의 행동을 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수많은 사례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⑤뜻을 아는 것은 인생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나 반대로 일이 너무 잘풀릴 때 모두 문제가 된다. 그리고 심지어 밥먹으로 가다가 문지방에 발을 찧었을 때와 같이 사소한 경우에도 문제가 되기도 한다. 삶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세부사항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의 ⑤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는 더 많은 경우에 우리는 ⑤뜻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도 베일에 감추어져 있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의 ⑤뜻과 관련된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보기에는 다수의 영적 침체가 여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⑤뜻을 알 수 없을 경우에 우리에게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이 되어 버리기 쉽다.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분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것까지는 다 알겠고,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주셨다는 것 까지는 다 알겠는데, 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큰 고난을 겪고 난 후에 그렇다. 특별한 도덕적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징계의 목적으로 그렇게 하신 거라고 보기 어려운 경우에 그렇다. 또 내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경우에 그렇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이 나에게 더 알 수 없는 분이 되어 버리셔서 하나님과 더욱 애매 모호한 관계가 되었버렸기 때문이다. 장기간의 영적 침체는 여기에서 발생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그리고 이 기간이 오래되어 감에 따라 우리는 슬슬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족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침체를 심화시킨다. 참 어려운 문제이다. 이에 관한 제임스 패커의 지혜로운 조언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발췌해 온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이런저런 일들을 허락하셨을지를 연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지혜란 이러한 능력이기는커녕 우리가 그런 쪽에 무능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냉정할 정도로 명민하고 현실적으로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지혜는 유토피아적 환상들, 그릇된 감상 또는 장밋빛 안경을 쓰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죄로 말미암은 이러한 고질적인 비현실주의는 우리가 지혜를 갖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도서 1:2) 솔로몬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그가 말하려 했던 것은 지혜의 진정한 기초란, 이 세상의 진로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며, '해 아래'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우리에게 매우 불가해하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만사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내려는 낙관적인 기대는 궁극적으로 바로 이러한 비관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솔로몬은 이러한 사실들을 직면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참된 지혜를 갖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훈계가 필요하다. 이러한 허식이 우리 몸에 배게되면, 하나님이 우리와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행하신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확신하며,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즉시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우 고통스럽고 불가해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의 비밀 회의장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 기분 좋은 환상은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자신의 영성 부족을 탓하기도 한다. 육체적, 정식적 혹은 영적인 침체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이런 식의 무익한 탐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점에서 이전에 가졌던 생각에 대해 아주 철저히 회개하고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이후로 우리의 영적 생활 전체가 황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솔로몬은 지혜로운 삶에 대해 개략적인 지침을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 할 수 있는 한 선을 행하라. 하나님이 언젠가 당신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은밀한 가운데서라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은 삼가라. 현재에 살며, 그것을 철저히 즐기라. 현재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선물이다. 너무 교만하거나 너무 경건해서 웃거나 흥겨워하지 조차 않는 지나치게 영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 당신에게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면서 인생의 문제들은 하나님께 일임하라. 궁극적 가치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측량하시게 하라. 당신 편에서 할 일은 주어진 모든 분별력과 진취성을 이용해서 앞에 놓여 있는 기회들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길이다. 그리고 믿음의 삶의 한 측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불가사의한 섭리의 하나님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그 기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놀랍도록 복잡한 우주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죄와 사단으로부터 구속을 계획하신 하나님이 비록 지금 당장은 자신의 손을 감추고 계신다 해도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지혜로 우리를 지혜롭게 하신다."


고난과 하나님의 ⑤뜻에 관해서는 http://yyydddwww.tistory.com/89에 몇개의 글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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