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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것인가

신앙과 쾌락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17:05

(1)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즐거워하고 풍성함과 선함으로 가득한 창조세계를 향유하길 원하신다. … 그것은 지금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두신 뜻이다. … 하나님은 우울한 하늘과 흙탕물 그리고 무색의 세상, 게다가 흰쌀 외에는 먹을 것이 없는 세상을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많은 열매와 채소로 세상을 채우셨다. 인간이 이 모든 것을 향유하도록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향유하는 데 필요한 감각을 주셨다. … 하나님은 이런 기능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 즉, 창조한 모든 것을 가장 충만한 상태로 향유하도록 하셨다.  [존 맥아더,『우주와 인간의 시작』(The Battle for the Beginning)]

 

(2) 신앙은 인간의 즐거움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적절하고 절제하며 합당한 방법으로 누리도록 하게 할 뿐이다. 기독교는 육신의 적절한 즐거움을 인정한다. 신앙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완전히 자유로우며 대화와 오락에서도 적절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한다. 즉 우리의 선천적 욕구의 만족을 허락하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이 적절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비결은 영적인 것들에서 오는 더 큰 기쁨을 바라보면서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영적인 즐거움이 훨씬 더 뛰어나므로 육신의 것들을 그 자체의 즐거움만을 위해 즐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조지 마즈던,『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3) 사람마다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바른성경 전도서 3장 13절]

 

(4)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만물을 주셨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함(frui)에 이르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함(uti)을 위하여 주신 것이다. 인간의 비극은 이 수단과 목적을 전도(顚倒)하는 데 있다. 인간의 모든 타락이 여기서 비롯된다. 인간의 즐거움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며, 다른 대상에게서 그것을 찾는 것은 그 자체가 죄이며, 삶 속에서 더욱 진리를 버리지 않을 수 없게 하여 진실을 좇는 삶을 불가능하게 한다. 궁극적으로 즐거워함의 대상인 하나님을 사용하고, 단지 거기에 이르도록 사용함에 공여되어야 할 사물들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전도(顚倒)된 사랑의 질서 안에서 살게 된다. 그러한 전도된 사랑의 질서(ordo amoris)를 따라 사는 것은 창조 목적인 선을 거절하고 악을 좇는 삶인데, ‘악’(惡)은 실재가 아니니, 좇기는 하지만 다다를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이런 전도된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의 욕망은 또 다른 사랑의 질서를 가지고 사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의 충돌 속에서 억압과 배척을 경험한다. 따라서 사람 안에 있는 전도된 사랑의 질서는 권력을 지향한다. 이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하여 거짓되게 구축된 자신의 사랑의 질서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악한 인간들 속에서 볼 수 있는 이 치열한 경쟁은 대부분 그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인간들의 몸부림을 반영한다. 거기서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 아름다운 대신 추루(pravis)한 존재가 되며, 탁월한 대신 무가치한 존재가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면서도 자신이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으며, 그것을 추구한다. 복음전도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참된 행복의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김남준,『자기 깨어짐』, p.199, 각주 102]

 

(5) 어떤 피조 된 존재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성향을 지닌 마음의 기질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에 대한 가장 합당한 증거는 우리의 사랑의 종류와 정도가 우리를 비롯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실행 방식과 순서와 정도에 있어서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와 통치에 있어 피조물들에 대해 행사하시는 사랑의 방식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의 실행이 모든 것의 첫 번째 원인이자 가장 높으신 섭리자로서 하나님이 피조물들의 행복에 관심을 두시는 방식과, 하나님 자신의 지고한 목적으로서 하나님 자신에 대해 스스로 종속하시는 방식에 일치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참된 미덕의 본질』]

 

(6) 칼뱅은 한걸음 더 나아가, 각종 음식을 통해 얻는 기쁨은 정당한 즐거움으로서 신자들은 이것을 적극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라고 생각했다. 그는 갖가지 맛과 색, 향취를 내는 과일과 곡식은 하나님의 세심한 솜씨와 선함을 드러내는 음식이기에 신자들은 그것을 배고픔을 달래는 양식의 차원을 넘어 삶을 즐겁게 하는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로 여기고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일상에서 얻는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을 피할 필요가 없듯이 음식을 통한 즐거움과 위안도 죄악시할 필요가 없으며, 이것을 일부러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칼뱅은 포도주와 같은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에(시 104:15) 흥을 돋우기 위하여 얼마든지 마실 수 있으며, 음식을 경우와 용도에 맞게 즐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 중의 하나로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음식을 먹고 즐길 때 음식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그분의 솜씨를 찬양함으로써, 우리는 탐식의 유혹을 극복하고 경건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원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p.174]

 

(7) 어떤 것을 철저히 진지하게 대하면서 동시에 때로 그것을 게임처럼 가볍게 대할 능력과 의지를 견지하는 것은, 어렵도고 즐거운 삶의 묘(妙)입니다. [C.S.루이스,『네 가지 사랑』, p.154]

 

(8) 자기와 가족들이 함께 그 즐거움을 누리자. "너는 모든 복을 인하여 기뻐할지니라" (11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법도를 준행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섭리에 의하여 주어지는 선물들을 누림으로써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복된 일을 내려주셨든지 간에, 우리는 모든 즐거움과 위로의 근원으로 흘러가는 그 흐름을 추적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최고로 즐겁게 활용하는 것이 그분의 뜻인 것이다.  [매튜 헨리 성경 주석, 신명기 26장 11절]


(9) 어려운 점은 이것이다. 인간이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러한 경향성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어디까지는 제한할 것인가 하는 지점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름다움 교리를 다룰 때는 하나님이 충분히 아름다우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렇기에 그분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한다. 한편 동시에 성경은 우리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양자 사이의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

 

(10) 신약성경은 자기부인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자기부인 자체를 목적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많이 그렇게 할 경우 최종적으로 얻게 될 것들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성경 구절에서는, 우리의 갈망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의 사고 속에는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고 간절히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은 나쁘다는 관념이 도사리고 있는 듯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칸트와 스토아학파의 사상에서 스며든 것이지, 결코 기독교 신앙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복음서가 당당하게 약속하는 보상, 그 엄청난 보상들을 생각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갈망이 너무 강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말씀하실 듯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한심한 피조물인지, 무한한 기쁨을 주겠노라는 제안을 듣고서도 그저, 술이나 섹스나 야망 같은 것들이나 만지작거리며 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 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 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C. S. 루이스,『영광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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