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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방법론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6. 21. 14:08

0. 이하 '번역'이라 함은 영어에서 한국어로의 번역을 의미 한다.

 

1. 번역 방법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한 쪽은 번역을 "번역"인 것 처럼 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고, 다른 한 쪽은 번역을 마치 자국어로 쓰여진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런 식의 대립이 항상 그렇듯이, 어느 한 극단을 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시 항상 그렇듯이, 애매한 입장을 취해서도 안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나는, 원칙적으로 번역은 마치 자국어로 쓰여진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① 원전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경우 중에서도 특별히 가치 있는 문장인 경우와 ② 다의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경우, ③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는 경우, ④ 직역 자체가 목적인 경우에만 직역을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번역이라는 것을 하는 목적이, 영어를 잘 읽지 못하는 독자로 하여금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일 뿐더러, '직역'이라는 개념이 어느 정도 허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직역 개념이 다소 허구성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흔히 '직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상은 '사전 편찬자가 만들어 놓은 한국어 표현'을 그대로 등치시켜 놓는 것을 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번역을 할 때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의역을 주(主)로 하는 이상 번역이 어느 정도의 창작이 될 수 밖에 없겠지만, 역시 동시에 원저자의 표현을 살리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의역의 한계선이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로의 번역이 최우선이긴 하지만, 만약 동시에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잘한) 번역이다. 이것을 지향점으로 삼아 번역을 해야 한다. '직역에 가까우면서도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한 것이 가장 잘한 것이다.

  이렇게 원칙적인 입장을 정리하도록 하자. 번역을 할 때는 가장 먼저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시작하여야 한다.

 

2. 영어에서는 어떤 입장이나 가정을 앞 문장에서 전제한 다음에, 다음 문장 부터는 이 전제를 생략하고 문장을 서술해 나가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자연계가 더 이상 자연계의 사건들에 관여하지 않는 신적인 창조자를 시사한다고 이해하며 자연계를 이신론적인 방식으로 읽는다. 신은 시계의 태엽을 감고 나서 시계 스스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라는 글에서, "신은 시계의 태엽을 감고나서 시계 스스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둔다."라는 문장 앞에는 "이 입장에 따르면"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어로 번역할 때는 이런 식의 문장을 구사해서는 안 된다. 감춰진 전제를 명시적으로 밝혀주어야 한다.

 

3. 영어에서는 대명사, 대동사, 대형용사(?)가 빈번하게 사용되지만,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원래의 명사, 원래의 동사, 원래의 형용사를 살려주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영어의 대명사, 대동사, 대형용사(?)를 직역해서는 안 된다. 이걸 그대로 직역할 경우 매우 읽기 힘든 한국어 문장이 된다. 너무 사소해서 많은 번역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매우 치명적이다. 저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듣지 못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4. 영어에서는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려 들지만, 반대로 한국어는 가급적 단 · 복을 구분하지 않고, 굳이 복수임을 표현해야할 경우가 아니라면 나머지는 모두 단수로 뭉뚱그린다. 영어의 복수 표현을 모두 살려서 '들'로 번역하면 어색한 한국어가 된다. 단수로 표현된 한국어라고 해서 (복수가 아닌) 단수를 나타내는 것은 아닐 뿐더러, 글쓴이 역시 단수를 나타내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5. 한국에서는 가급적 능동태를 취한 문장을 사용한다. 피동형으로 쓰인 문장은 번역투이다. 주로 일본어 번역문에 많다.

 

6. ―(dash, 대시)나 ;(semicolon 세미콜론)은 한국어에서는 쓰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문맥상의 의미를 풀어서 한국어로 순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그러나 원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경우까지 굳이 풀어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때는 그냥 대시나 세미콜론을 살려서 그대로 번역하는 수 밖에 없다.

 

7. 영어에서는 :(colon 콜론) 앞은 붙여쓰고 콜론 뒤는 띠어 쓰지만, 한국어에서는 앞뒤를 모두 띠어 쓴다.

  예를 들면, 영어에서는 [Jonathan Edwards: American Philosopher]라고 쓰지만, 한국어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 : 미국 철학자]라고 쓴다.

 

8. 영어에서는 단어나 어구를 열거할 때 A, B, C and D의 형태를 띠지만, 한국어에서는 그냥 A, B, C, D라고 하면 충분하다. 굳이 "그리고"를 마지막에 붙여줄 필요가 없다.

 

9. 형용사를 매번 '~적(的)'이라고 번역하면 어색한 한국어가 된다. '~적'이라는 형용사(한국어 문법에서는 관형사)가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자리잡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가급적 피수식어와의 논리적인 관계를 따져서 한국어로 풀어준다. 한국어 문장에서 '~적'을 남발하는 것은 글쓴이가 (자신이 글쓴이 이면서도!) 수식어와 피수식어 사이의 논리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적'이라고 번역하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는 경우도 자주 있다. '~적'이라고 매번 번역하는 것이 민망할 때는 '~상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ex)존재론적 ⇒ 존재론상의

 

10. of를 매번 살려서 "~의"라고 번역하는 것도 한국어에서는 어색하다. 이 경우에는 단순한 명사만의 연결로 바꾸어 주거나, 역시 논리관계를 풀어서 써주면 된다.

  ex)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자동차 ⇒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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