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학문과 하나님 본문

학문하기

학문과 하나님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17:12

(1) 자연과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모든 질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의 울림입니다. 이것들이 인간의 인식 속에서 작용할 때 학문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식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당신의 지식 안에서 이 세계를 알고 계셨으며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지식은 시간 속에 그 모든 창조물로 만들어졌고, 그것을 도입한 시간성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사물들에 대한 신적 지식을 손상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모든 인간과 사물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은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제로 나타나게 될 모든 것의 조건이었습니다. 영원 속에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또한 시간 속에서 이 모든 것이 계기적(繼起的)으로 나타남을 보시면서 기뻐하십니다. 창조된 세계는 창조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관념의 예전(禮典)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성경과 신앙의 도움을 받아 모든 사물의 존재와 그 존재들의 연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을 배우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년 ~ 1753년)는 사실상 자연의 체계와 조화, 그리고 아름다움은 그것이 하나의 무한히 지혜롭고 완전한 정신이신 하나님과, 자신의 힘으로 모든 사물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산물임을 보여준다고 하였습니다. [김남준,『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pp.174 ~ 175 중략 표시는 생략함]

 

(2)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진리의 유일한 근원(unicum veritatis fontem)으로 간주한다면, 하나님의 성령을 모독하려고 하지 않는 한, 진리 그 자체를 거절하거나 혹은 그 진리가 어디에 나타나든지 간에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 하나님의 성령이 오직 믿는 자 안에만 거하신다(롬 8:9)는 진술은, 우리를 하나님께 성전으로 거룩하게 성별하여 세우시는 성화의 성령(spiritu sanctificationis)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고전 3:16). … 주님께서,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의 활동과 봉사에 의해 물리학이나 변증학, 수학 기타 학문에 있어서 도움을 받게 되기를 원하셨다면, 마땅히 그런 도움들을 받아들여 사용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가 이러한 학문들로부터 값없이 제공된 하나님의 은사들(Dei dona)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게으름에 대해 마땅히 공의로운 형벌을 받아야만(demus iustas ignaviae nostrae poenas) 하기 때문이다. [존 칼빈,『기독교 강요2』, 기독교문사 刊, pp.75 ~ 77]

 

(3) 18세기 초만해도 '자연철학'은 '철학'에서 분리되지 않았었다. 두 학문은 19세기 이후에 분리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에 이르러 이 분야의 중요성이 인정되면서 언어의 변천을 거쳐 '과학'이 자연 과학을 의미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에드워즈 시대에는 모든 사상가들이 자연철학과 철학이 모두(더 나아가 신학도) 한 분야에 속한다고 믿었다. 자연 과학은 본래 현실에 대한 더 넓은 분야들을 포함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가서 '자연'은 현실의 가장 높은 형태라는 생각과 자연 과학이 분명한 한 양식이라는 생각이 널리퍼지게 되었다. 에드워즈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 자연 과학과 신학이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연 철학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 수학자들, 그리고 자연철학자들은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이론들을 자신의 실제적인 관심사와 결합시키려는 전통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 [조지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pp.109 ~ 110]

 

(4) 당대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도 사람이 자연의 신비를 탐구할수록 창조주의 지혜를 더 경외하게 될 것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오직 모든 지혜의 근원이신 우주의 통치자만이 그런 자연의 경이를 설명하실 수 있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었다. [조지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p.108]

 

(5) 성경은 인간학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으며 또한 자연학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 이래로 인간과 자연 세계에 대한 다양한 학문들이 발달해 온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학문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들에 대하여 아무리 철처히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서 도출되는 결과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학문적 성과들 일 뿐이다. 학문이란 이성을 사용하여 그 학문의 대상이 되는 사물이나 현상을 분석하여 추론함으로써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아 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정확히 판단하여, 미래를 또한 예측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리학이면 물리현상, 정치학이면 정치현상, 인간학이면 인간 존재 등이 그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이성의 추론으로 학문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뿐 최종적으로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하고 또 그것이 존재하는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지는 못한다. 성경은 아인슈타인(Alber Einstein)의 상대성 이론이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성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학문을 통해 발견한 진리들이 참된 것인지의 여부와,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무슨 동기를 가지고 누구를 위하여 사용해야 할지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경진리를 믿는 사람이 정치학을 배우고 정치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정치학을 배우고 정치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남준, 『신학적 성경 읽기』]

'학문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칭적 사고의 문제점  (0) 2016.11.24
근대 과학이 전제하는 가정들  (0) 2016.06.22
번역방법론  (3) 2016.06.21
고전(古典) 읽기  (0) 2016.0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