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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

한국교회에 보내는 편지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16:53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이 스스로 겸손하여 기도하며 내 얼굴을 찾고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그들의 땅을 고쳐 주겠다." [역대하 7장 14절]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제가 조금도 우월적 지위에서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비난 밖에 있는 사람임을 전제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겠습니다. 표현이 좀 그렇게 보일 것이기 때문에 미리 밝혀두는 바입니다. 저도 교회입니다. 따라서 이 편지는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민망해 하는 것은 이 점이 아닙니다. 제가 민망한 것은 오히려 제가 교회를 너무 조금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대한 저의 사랑의 정도와는 관계 없이, 아래의 내용 자체에는 별로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랑이 적어서 더 가차없이 할말을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꽤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지금 그런 말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쌉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너무 고상하고 점잖으며 세련된 교회생활로 두꺼워진 한국 교인들의 폐부를 뚫고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너무 안 혼났습니다. 그러나 김용의 선교사님의 표현 대로 "들어야 될 욕을 듣는 것이기 때문에 시원"할지도 모릅니다.

  또 '한국교회'라는 추상적 집단을 소재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자칫하면 허수아비 때리기가 될 우려가 있기는 합니다. 또한 '아닌데? 우리 교회는 아닌데? 그건 다른 교회 얘긴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교회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교회의 구성원이므로 다 당신과 관련된 아야기 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당신의 교회에는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온 교회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에 당신과 관련된 이야기 입니다. 니 교회가 내 교회고 내 교회가 니 교회입니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 교회에 가장 시급한 지적 사항은 이것입니다. 교회의 의로움이 세상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런 짓은 안하는데, 교인들은 하고 있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과장된 어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세상만 못한 상태에 있는 교회가, 우습게도 세상의 도덕성과 무가치함과 비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꼴사나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는 매일 '교회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며, 따라서 교회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세상은 교회를 필요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의 몸인 한국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악 거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원하는 한 교회에는 소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세상이 교회를 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가 세상을 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을 충만히 채워주셔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는한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헐떡일 것이고, 그러는 한, 교회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만 갈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세상의 허망함과 무가치함과 소망없음을 지적한 것은 제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해 봅시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세상에 소망이 없어 보입니까, 교회에 소망이 없어보입니까? 지금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상황 아닙니까? 지금 세상이 교회보다 더 허망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 가봐야 별볼일 없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는 문자 그대로 세상만 못합니다. 거의 모든 방면에서 세상만 못합니다.

  더 더러운 사람들이 모여서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만 못하다고 우기면서, 우월감에 한 번씩 빠져보는 집단적 자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도덕적으로 더 우월한 사람들이 이짓을 해도 꼴사나운데, 더 못한 것들이 이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우리는 욕먹어 마땅합니다. 적어도 지금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가 허망하고, 소망이 없고, 부패했고, 말뿐이고, 가봐야 별것 없는 곳입니다. 세상은 재미라도 있고, 세상은 자기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곧 "여러분 우리는 지금 좆같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더 이상은 지금 살던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도 우리보다 더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존나 회개해야 하고 뜯어 고쳐져야 합니다. 딸딸이는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 낯이 뜨겁고 면목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 그래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그렇지 않은 것은 날마다 딸딸이를 쳐댔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더러움에 대해 회개하고 싶고 더 순결하게 되고 싶은 '성욕'이 조작적으로 해소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에 대해 회개하여 순결하게 되고 싶은 욕구는 제대로 된 반응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는 그렇게 해소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욕구는 실제로 회개를 함으로써 해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더럽다는 것과 우리가 세상에서 악의 축으로서 기능해왔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회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다른 몸인 교회가 그런 짓을 해왔다는 것을 고백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죄를 고백하는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회개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만큼 교회가 개인주의화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과거에는 가족 중에 누구 한 명이 부끄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 오빠, 언니는 그것을 자기의 부끄러움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이스라엘에서는 누군가 악을 행하면, 그것은 '우리 중에 악이 있게 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집단적 회개의 개념을 실제로 적용할 때입니다.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것을 지금 실제로 다시 적용할 때입니다.

  저는 여기서 집단적 회개의 개념을 분석하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의 상황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장실패냐 정부실패냐를 논할 때의 맥락에서) '세상 실패'가 아니라 '교회 실패'의 상황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신약보다도 구약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에 대해 '아니, 회개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에 대해 회개할 것아닙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집단적 회개는 어떤 대상에 '대해' 회개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집단적 회개는 구체적인 죄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상황, 나쁜 현실에 직면한 경우에도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교회의 부정적인 상황이 무엇인지 알아야 회개할 것 아닙니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 회개에 필요한 만큼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엉망진창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조롱거리이며, 교회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교회를 엉망으로 만든 교회 안의 문제들도 분명합니다. 한편으로 집단적 회개가 이루어질 때는 문제 분석도 일단 회개를 선포한 이후에 시행되었다는 것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CBS와 CTS에서 방영해야 할 것은 "우리 한국 교회(we the church)는 잘못 살아 왔습니다. 우리가 타락했고 악했으며,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그렇게 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한 것이며, 우리의 나빴던 점들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나쁜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서, 세상의 빛이라고 하면서 세상만 못한 일들을 했습니다. 우리가 나쁜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 더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예배 중에 은혜를 입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종교적 욕구를 충족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았다'고 뻥치지 마십시오. 그렇게 느꼈어도 착각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왜 교회는 이 모양입니까? 그냥 딸딸이 한 번 더 친 것뿐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기도 제목들은 변죽을 울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영화롭게 해달라'고 또는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주님 우리가 개같이 살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세상의 악의 축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했는데, 우리가 이렇게 사고를 쳤는데, 대책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면목이 없지만 제발 좀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교회인 우리가 한 짓거리들에 대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잘못은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중보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건 '내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문제를 다루듯 접근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며 마음의 위안을 얻기 전에 행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존나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다같이 존나 회개하자'는 메세지는 들을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교회를 찾아가야 회개할 수 있습니까? 저는 회개하고 싶습니다. 저의 실천적 측면은 혼나야 할 것들 투성이인데, 왜 목사님들 눈에는 교인들의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니 은혜니 그런 얘기는 그만합시다. 이론과 학설은 충분합니다. 지겹도록 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의 생각이나 왈가왈부가 아니라,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쓰고 베옷을 입는 것입니다. 성경의 어디를 봐도 지금처럼 문제를 분석하느라 정작 해야 할 회개를 하지 않는 대목은 없습니다. 회개를 하긴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할뿐이었습니다.

  온 교회가 마음을 찢고 하나님 앞에서 울고, 하나님은 그런 교회에 대해 마음을 여시며, 사실은 마음이 기쁘신데 아직 화난 것처럼 말씀하시는,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녀로서 친밀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난 것처럼 말씀하셔도 '이제 화를 푸셨구나' 하는 것을 온 교회가 알아, 젖은 눈으로 안도하는 그런 낭만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문제가 있으면 일단 옷을 찢어야 한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본 경험에서 나오는 지식은 어디로 간 것입니까?

  "주님 우리는 순결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신실한 몇 사람 만이 아니라, 우리 전체가 순결해졌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실제로 우리에게는 '교회 곧 내가' 더럽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우리의 몸에 똥이 묻어 있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날마다 인터넷의 한 페이지는 교회의 어이 없는 행동들과 상스러움, 부도덕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집단으로 회개했다는 말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까?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면 도대체 그 '문제의 교회'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상상속의 동물입니까? 설마 진짜 남의 교회 얘기라 하더라도, 늘상 교회는 모두 하나라고 이야기 하면서 왜 이럴 때는 '남의' 교회라고 말합니까? 우리 교회 그러니까 내가 거기에 껴있는 그 교회 그러니까 나와 우리 교회 권사님, 장로님, 목사님, 집사님, 구역장님이 회개해야할 사람들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에 어떻게 회개할 것인가를 궁리해야 합니다. 도대체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진단하는 것은 고상한 지적인 작업을 하는 척하며, 문제를 회피해가는 것입니다. 남의 교회에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좆이 되었는데도 그렇습니까?

  우리의 가슴 속에 지금 있어야 하는 마음은, '그렇다. 우리 지금 존나 문제 투성이다. 너도 문제고, 나도 문제고, 우리는 엉망진창이다. 당분간 번잡한 일들을 버리고, 우리가 총체적으로 뜯어 고쳐지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움만 된다면, 전 교인이 문자 그대로, 머리에 재를 뿌리고, 옷을 찢고, 베옷을 입자고 말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상(喪)을 당한 것 같은 애도기간에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뿐만 아니라 교회 각 구성원들이 서로서로 확연하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형식적으로도 특별하게 구분된 애도기간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회개기간을 선포해야 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 온 교회가 3일씩, 일주일씩 금씩하기로 하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도대체 금식은 언제합니까? 저는 금식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애통해하면서 온 교회가 금식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또 여기서 언급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집단적이고 형식적으로도 그러한 애통해 하는 기간에 돌입하면, 십충팔구 사탄은 개인주의를 이용해 이것에 훼방을 놓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누군가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면 열정적으로 그에 따라 육체를 움직이는 것을 낯설어 하는 개인주의, 집단적 열정을 어색해하는 개인주의, 그리고 어떤 이유로든 남이 하자고 하는대로 하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개인주의를 이용할 것입니다. 이때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회개할 의사가 없는 사람을 교회에서 쫓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당한 축출의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나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살기(殺氣)를 띠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 미움 역시 몇 안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미움입니다. "그 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대하 15 : 11 ~ 13).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며,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정말로 지옥불에 떨여져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믿고 진짜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존나 하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온 세상의 소망이라고 날마다 말하지만, 그 말이 뭔말인지 우리는 솔직히 모르고 있고, 삶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으니, 우리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고, 교회가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니, 세상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행복'을 중요시 하는 때에, 주변에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히 행복한 바울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교회는 미어터졌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진짜로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바울 같은 사람이 한국 교회에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교회 전체가 썪었다는 비난을 듣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한 가지는 우리의 생활 방식이 좀 더 급진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점은 중산층의 라이프 스타일의 안락함에 너무 익숙하다는 것과, 이것을 져버리라고 이야기하는 모든 기독교 내의 주장들을 '극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미묘하고 흐릿한 부분이어서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이 좀 더 급진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정말 극단적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는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제가 사탄이었다면, 중산층의 안락한 생활양식을 건드리는 모든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방식이 교회에 만연하게 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속일 것입니다. 중산층의 라이프 스타일을 최고 권위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비추어 그것을 흔드는 모든 가르침을 비진리 혹은 오류 혹은 이단으로 규정하게 만들어서, 신자들이 머릿 속에서 그런 가르침은 고려조차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생각을 빼놓고 지나가게 만들거나,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제가 사탄이라면 정말 그런 방식을 사용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여러 병패의 근본 원인으로 이것저것들을 지적하는데 간단합니다. 교인들이 자기 인생에서 손해 볼 생각이 조금도 없고, 불통할 각오가 조금도 없으며, 조금도 인생이 구겨질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붙드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니 세상에서 여유롭고 넉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똑같이 상스럽고 팍팍합니다. 예비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실 믿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은 자기 인생을 형통케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또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또한 교회 개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전적이며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계신 성자 하나님과, 임의로 홀연히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개혁? 그것 어떻게하는 것인데?' 하고 질문을 받았을 때, 성자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의지해야 한다고 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는 순전해질 지어다'라고 말씀해 주시면 교회는 순전해집니다. 성령님이 임하셔서 회중을 휘저으시면 교회는 살아납니다. 말하자면 이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교회에게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소서."


우리 함께 기도해. 주 앞에 나와. 무릎꿇고. 긍휼 베푸시는 주.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하늘 문이 열리고 은혜의 빗줄기 이 땅 가득 내리도록. 마침내 주 오셔서 의의 빗줄기 우리 위에 부으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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