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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론

성경 해석 방법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7. 1. 23. 06:34

"인간, 특히 그 중에서도 남자들은 절대적으로 충성할 대상을 바라는 경향이 있다. 성경 해석에 대한 온갖 (다른 말로 '도그마'라 불리는) 규제적 규범들 역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1) 만약 올바른 해석 방법에 의해 확정된 사실관계가 그대로 사실이 아닐 경우에,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전체 취지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경우라면 그에 대한 반대 증거들은 배척되어야 한다.


(2) 귀납적으로 형성한 개념을 규범력을 갖는 공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구성한 거의 대부분의 개념들은 구체적인 맥락들 중에 흩어져 있는 공통되는 내용들을 편의상 귀납적으로 묶어 만든 개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자체가 다시 살아있는 규제적 성경 해석 원리로서 작동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그것은 횡포다.


(3)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참되다. 성경이 '말하고자 한 바'에는 틀림이나 거짓이 없다.

(4) 원본과 현재의 번역본 사이의 상위(相違)의 정도는 다른 고전 문헌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5) 성경은 그 화자가 하나님이라는 점을 감안하는 한도에서, 다른 고전 문헌들과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

(6) 장르를 구분하고 그 특성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은 일면 타당성을 갖지만, 장르라는 것 자체가 귀납적 개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자체가 살아있는 실재인 것은 아니다. 다만 고대인들이 어떤 규칙들을 의식하면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장르에 따른 해석이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반대로 경우에 따라서는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기자의 학식이 일천한 경우라든가, 기자가 너무 흥분한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7) 문맥에 따라 의미가 밝혀지는 해석도 절대화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우리가 A에 대해 이야기하다가도 그것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좀 쌩뚱맞은  B에 대한 얘기를 꼭 하고 싶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 얘기를 한다.

(8) 또 단어의 성경 내에서의 일반적인 용법에 따른 해석도 절대화 할 수 없다. 역시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우리는 별생각 없이 어떤 단어를 쓰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의 의미를 사전식으로 추출해서 개념화 하는 일이 그냥 참고할만한 견해에 불과한 것은 이 때문이다.

(9)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이 영감되었다고 할 때, 그러니까 인간 저자가 영감을 받았을 때(inspired) 그 사람 안팎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지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근데 이 부분에 대해 성경에서 언급이 없다.

(10)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 세력에 대항하여 sola scriptura를 외쳐야 했고, 지난 100여년간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맞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여야 했기 때문에, 성경을 높이는 과정에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였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특별히 자구하나 단어하나 하나에 집착하는 성경해석학의 경향을 보였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직접 수신자들은 취하지 않았던 태도이다.


(11) 무류한(infallible)이라는 단어는, 성경이 그 목적을 종교적으로 성취하는데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앤드류 제노스(Andrew C. Zenos) 교수의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경은 모든 종교적이고 윤리적이며 영적인 가치에 있어서 신앙과 실천의 틀림이 없는 규칙이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성경은 많은 실수와 오류, 그리고 불일치를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 [올리버 버스웰,『조직신학 1권』, 291쪽]


(12) C. S 루이스는 ① 창세기에 나오는 타락이 반드시 역사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가 민간 설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단언한다. … 그는 진리가 처음에는 신화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 루이스는 노아의 방주와 태양이 멈췄다는 이야기도 구약에 나오는 신화적 이야기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② 루이스는 구약이 영감으로 기록된 거룩한 글이며, 하나님의 계시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약의 모든 문장이 역사적 혹은 과학적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구약을 그런식으로 보지 않은 제롬과 존 칼빈의 주장에 동조한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채택된 문학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문학(소설)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문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③ 루이스는 요한복음의 기록이 몇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고 보았다. ④ 루이스는 성경을 오류 없는 권위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관점이나 가톨릭의 관점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어디에서도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즉, 루이스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검토한 후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⑤ 또 루이스는 성경의 모든 단락이 다른 단락과 정확히 똑같은 의미로 오류가 없다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그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하기 때문에 구약의 군대 수가 통계적으로 정확하다고 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현대인들이 때로 성경을 통해 주장하는 진리를 아마도 고대 성경의 저자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⑥ 루이스는 성경의 모든 단락과 문장, 단어가 직접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는 성경의 모든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⑦ 루이스는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은 그리스도이지 성경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⑧ 루이스는 조직신학이나 성경에 관한 일관된 교리를 세우는 것을 결코 본질적인 문제로 보지 않았다. 루이스에게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마음을 활짝 열어 '신성한 물고기'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윌 바우스, 『C. S. 루이스의 신학』, pp.34~45] 


(13) 무오성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먼저 중요한 것은, ① 결국에 중요한 것은 규범적인 일이므로 결국에는 이 부분에 대해 논해야 하겠지만, '먼저'해야 할 일은 일단 성실하게 이와 관련된 사실들을 기술적(descriptive)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일단 무엇이 fact인지를 자세하게 이야기 하는 일이 필요하다. ② 또 반드시 확정되어야 하는 부분은 하나님이 이 종이에 적힌 기록을 남겨 주신 이유와, 이런 형태로 남겨주신 이유, 오류가 있다면 오류를 보유한 채로 두신 이유, 이렇게 편집되고 편찬되어 보존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당대의 일차적 수신자들만을 위해 성경을 기록하신 것인데, 우리가 그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성경의 상당 부분의 문자적 기록의 내용이 실제 세계와 일치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영감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내전기』의 통찰이 뛰어 나듯이, 그것을 적은 기자들이 제대로 적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우연일 수도 있다.


(14) 성경은 당대 독자들의 상식에 기초해서 쓰여졌다.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쓰여졌다. 특히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인들의 세계관을 고려하여 쓰여졌다.


(15) 설교자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의 해석자이다. 그의 임무는 엄밀히 말해서 두 가지 과정을 포함한다. 먼저, 본문이 그 당시 청중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 본문이 오늘을 사는 신자들의 실존적 삶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이 첫 번째 과정을 해석(exegesis) 두 번째 과정을 해설(exposition)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의미에, 후자는 의의에 관심을 가진다.  [정근두, 『마틴 로이드 존스에게 배우는 설교』, p.82]


(16) 성경 무오성이란, [① 시, ② 비유, ③ 환상에 대한 기술(description), ④ 메시지 전달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표현을 사용한 부분] 이외의 부분에서는, 성경이 언급하는 사실 대조가 가능한 모든 진술은, 사실과 일치한다는, 성경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되는 성질을 말한다. 이 개념을 이렇게 고정시키고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이 개념을 이렇게 고정시키고 나서 성경 무오성 개념에 관한 논쟁을 하여야 한다.


(17) 나는 성경 무오성을, "성경은 말하고자 하는 바에 있어서 언제나 옳다"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 점에 있어서는 사실 대조를 했을 때, 성경의 진술이 거짓(false)일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런데 이 개념에도 사실은 문제가 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 바에 대해서는 왜 성경이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즉, 틀린 진술에 기반하여 말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 있다. 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쓰여진 책이 아니다. (영감에 의해 쓰여졌다는 말은, 그 영감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성경 기자가 성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②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하여 쓰여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자들이 갖는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오류를 용인하셨다. ③ 성경은 하나님에 영감에 의하여 쓰여졌고, 시, 비유, 환상에 대한 기술, 의미의 전달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표현을 사용한 부분  이외의 부분이면서, 사실대조가 가능한 부분에 대한 성경의 기술과 반대되는 증거들에 대한 인간들의 해석이 틀렸다. 성경에는 근대 종교개혁 이후의 보수적 신학자들이 생각하던 그런 '비오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18) 무오성과 관련해서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은, 전반적인 목적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것이 사실인 것이 중요하다면 사실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19) 무오성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는 성경 기자에게 영감을 주셨고, 그 구체적인 기록은 그 영에 대한 기자의 반응의 결과물로 이해하는 수도 있다. 하나님은 무엇이 적히도록 영감을 주셨지만, 그 기록과정 자체에는 직접 간섭을 하지 않으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은 이 기록을 세대마다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해왔다고 보는 것도 가능한 한 가지 입장이다. 그러면 무오성 문제를 피할 수는 있다.


(19) 문제가 되고 있는 단어나 구절 혹은 문장의 단순하고 일상적인 의미가 항상 최우선이고, 이와 다른 의미를 그 본문의 의미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다른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20) 보수주의의 근간은, 살아계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 무슨 생각으로 우리에게 이 책을 주셨는가, 어떻게 읽으라고 주신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있어야 하지, 자구 하나하나를 틀림이 없는 기록으로 보느냐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21) 나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자에게 말씀하실 때, 필요하다면 사실의 정확성을 훼손하는 것쯤은 하나도 개의치 않으셨다고 본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 마음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창작물로 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이 무오성 개념을 포기하고 나니 성경이 더 은혜롭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더 적극적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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