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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님의 블로그
1. 개인적으로 언약사상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 2. 언약사상 또는 언약신학 또는 언약신앙이라는 말은 꽤 모호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듯하다. ①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구속사 가운데 언약을 맺으시면서 관계해 오셨다는 신학(내지 사상)이고, ② 다른 하나는 선택 받은 자들의 집단 보다 좀 더 넓은 인적 적용 범위를 갖는, 언약 공동체라는 개념을 설정하고 그로부터, 실천적 측면에서 신자들의 여러 의무들을 이야기하는 신학(내지 사상)을 말한다. 3. 이 두 가지 중 앞의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고, 충분히 성경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후자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성경 위의' 신학이다. '성경 위의' 신학이란 성경 자체에서 기반했다기 보다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항들..
(1) 창세기에서 이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창조되었는지를 읽어내려 하는 것은 창세기의 저술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나, 창세기는 당시 주변의 고대 근동 신화와 유사한 문화적 비유적 구조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수긍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배우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최소한 창세기 1장의 저술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 이런식의 해석경향이 자연과학자들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신앙 혹은 자신들의 직업을 지켜내려는 '문돌이'들의 방어 전략인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문학적, 비유적' 이라는 표현을 서서 아예 논의의 차원을 달리해버리면, 정면 충돌해서 맞짱뜨는 것은 피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기독교를 관념과 이념, 교훈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 우..
도서목록을 정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인생이 짧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든 읽어보지 않은 것보다는 읽어 본 것이 대부분의 경우에 유익하다. 그러나 사는 날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우리의 건강과 정력에도 한계가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이나 표현에 있어서 좋지 못한 책들을 가려내어, 좋은 내용을 좋은 형식과 표현을 통해 담아 내고 있는 책을 반복해서 읽는 일에 우리의 '생(生)'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을 바쳐서 읽어야 할 '좋은 책'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도 위하는 것이다. 여기 있는 목록 중에는 나도 아직 읽지 못한 것들도 있다. 다만 아직까지 이 목록에 남아 있는 것들은 '좋은 책'인 것으로 확정되었거나 '좋은 책'일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1) 우리가 비기독교인에게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내용들은 다음의 4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① 철학적 차원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적극적(공격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② 철학적 차원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소극적(방어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③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 ④ 실제로 나의 경우는 어떠한 경로에 의해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지가 그 4가지다. (2) 우리가 이 4가지 모두를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몇가지가 빠질 수 있다. 이 4가지 중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이야기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또 ①, ②, ③, ④를 순서대로 이야기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순서를 적절히 배열하거나 섞어 가며 해도 무방하다. (3) 우리는 베드로처럼 유대인에게 기독교를 ..
(1) 성경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관해서는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종류의 자유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2) 인간의 의지가 갖는 자유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① 강한 결정론, ② 약한 결정론, ③ 자유의지론이 그 셋이다. (3) 자유의지론은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 때 ① 인간은 선재하는 조건들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②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가 그것에 의해 충분하게(sufficiently) 정해지지는 않는다고 보는 견해다. (여기서 '충분하다'고 할 때의 '충분'이란 논리학에 등장하는 충분조건과 필요조건 이야기의 그 '충분'과 같은 뜻이다.) ③ 그래서 우리가 A가 아닌 B를 선호하도록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 ..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은 다른 어떤 계시와도 비견할 수 없이 가장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다는 바르트와 라너의 주장에는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예수님은 독보적으로 하나님을 세상에 설명하셨고(요 1:18),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요 1:14). 특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고전 1:18~25), 자비와 의(고후 5:21, 벧전 3:18)의 의미와 표현으로 생각하고 강조한다. 따라서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 우선성, 최종성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이 없다. 그러나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계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오셔서..
"학습 된 온갖 관점들로부터 벗어나 정직하게 의심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신앙의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1. 학계 전반에 걸쳐 신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이고 미성숙한 욕구와 바람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반대로 회의주의나 무신론 등은 이성적이며, 사물과 현상에 대한 황당한 평가는 하지 않는다고 보는듯하다. [폴 비츠] 1-2.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의심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이미' 어떤 관점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 대해 의심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문제의식을 느끼는 그 대상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기준'에 견주어 보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지 상태에서는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문제의식은 ..
(1) 법학교수 스티븐 스미스(Steven D. Smith)는 주목할 만한 저서 『세속적 담론에 대한 자각』(The Disenchantment of Secular Discourse)에서 통속적인(secular) 세계, 특히 정부와 정계 그리고 학계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어떤 토론 규칙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아무도 공적인 논의에 신앙적인 신념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도덕적 정당성이라든지 윤리적 악(惡)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일종의 금기 사항이다. 그랬다가는 어떤 종교적 신념이 진리인가를 두고 끝없는 입씨름이 벌어질 게 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자유와 평등에 관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용어들만 가지고 정의를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인간의..
[브루스 웨어는 자신이 Four-Point 칼빈주의자라 말한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기존의 Four-Point 칼빈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이 글의 맨 아래에는 Four-Point 칼빈주의의 주장이 나오고, 그 중 두 번째가 '다중목적' 논증으로서 브루스 웨어의 견해다. 브루스 웨어의 입장인 '다중목적설'은 내가 임의로 만든 표현이다. 이 글은 내가 번역하였다. 짧은 영어라 오역이 있을지 모른다. payment는 '대가'로, efficacy는 '효험'으로 번역했다. penalty는 '죄값'으로, punishment는 '형벌'로 번역했다. offer를 곳에 따라 '허락'으로 번역하였다. 해석에 자신이 없거나 의역을 한 때는 영문을 병기(倂記)하였다.] 속죄의 범위 : 쟁점, 입장, 핵심 성경 구절, 주요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