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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 방법

무어라 전할 것인가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17:48

(1) 우리가 비기독교인에게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내용들은 다음의 4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① 철학적 차원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적극적(공격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② 철학적 차원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소극적(방어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 ③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 ④ 실제로 나의 경우는 어떠한 경로에 의해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지가 그 4가지다. 

(2) 우리가 이 4가지 모두를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경우에 따라 몇가지가 빠질 수 있다. 이 4가지 중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이야기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또 ①, ②, ③, ④를 순서대로 이야기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상황에 따라 순서를 적절히 배열하거나 섞어 가며 해도 무방하다.

(3) 우리는 베드로처럼 유대인에게 기독교를 전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바울처럼 이방인에게 기독교를 전하고 있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전하는 것은 우리지만 그 결과로 마음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사람의 마음에 비춰지지 않는 한 거듭남은 일어날 수 없으므로,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전도하려는 사람의 마음에 비추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5) 철학적 차원에서 기독교를 적극적(공격적)으로 정당화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선결적으로 전제주의, 증거주의, 검증주의(귀추법을 활용하는 방식을 말한다)의 대립이 벌어지고 있다. 생각건대, 전제주의가 합리적으로 지탱되기 위한 성경적 근거는 너무 빈약해 보인다. 참고로 C. S.루이스와 프란시스 쉐퍼 모두 전제주의자가 아니었다.
공격적으로 기독교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오직 기독교만 이 세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체계임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2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기독교'가' 이 세상과 어떻게 잘 부합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설명으로는 이 세상과 부합하는 체계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6) 철학적 차원에서 기독교를 소극적(방어적)으로 정당화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신정론이 다뤄진다. 논리적 완결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의 의지의 자유와 하나님의 전적 주권의 문제도 여기서 다뤄질 수 있다. 방어적으로 기독교를 정당화한다는 것은, 일단 기독교가 다른 체계들보다 이 세계를 훨씬 더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기독교가 참인것으로 받아들였을 때 발생하는 지적인 난점들에 대해 해명 혹은 변명하는 것을 말한다. 

(7)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일에 있어서 많은 경우 실패한다는 점이다.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를 세속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속인들에게 교회어로 기독교를 전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세속인들에게 세속어로 기독교를 전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여기서는 ① 천지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 ②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③ 왜 성경을 현재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 믿는가, ④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 ⑤ 왜 하필 믿음인가, ⑥ 그런데 왜 꼭 교회를 가라는 것인가, ⑦ 우리와 한 패거리가 되어 달라는 말인가를 세속의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많은 경우 실수가 있는 점은 도대체 '죄'라는 것이 왜 문제인지를 설명하지 못하거나, 설명하더라도 너무 짧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밑도 끝도 없이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지어'라고 화제전환을 해버린다. 죄라는 것이 주의주의적 관점에서 매우 독특한 내용이라는 점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또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를 전할 때는, 우리도 객관적인 자료를 다루고 있음을 드러내면 좋다. (이 점에서 설교와 복음 전파는 다르다.)
  "이 점이 독특하긴 한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잘 납득은 안가도 그렇게 믿습니다. 물론 이것을 이성적으로 정당화하는 방법들이 여러가지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8) 마지막으로 실제로 나의 경우는 어떠한 경로에 의해 기독교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한다. 위의 세 가지 요소가 나에게는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최대한 정직하게 전해면 좋다.

(9) 어떤 의미에서 변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센스다. 내가 어떤 표현을 사용했을 때 상대방의 마음 속에서는 어떤 생각과 의문이 떠오를지를 예견해야 한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고 있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풀어서 상대방의 가슴이 시원하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어려운 작업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사람은 비슷하기 때문에 10가지 안쪽으로 충실한 설명을 준비해두면 된다.

(10) 세번째 사항 즉,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언급할 때 굳이 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하는 사람은 ① 예정론과 ② 하나님께로의 보편적 초청, ③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심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때 선택과 인간의 자유가 일관된 논리를 따라 머릿속에서 풀어지지 않았더라도, ⓐ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과, ⓑ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약속되어 있는 내용은 분명하다는 점만 확실하게 고정해두면 그것으로도 전도가 충분하다.


(11) 불신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왜' 기독교를 믿는 것인지에 대해서만 묻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신학실종의 상태에서는 보통의 기독교인들이 하는 말이나 행적을 보고 '저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부터 교정이 들어가야 한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 정말 모른다.


(12) 기독교의 유일성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본래 전 인류가 하나였다가,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라 흩어져 문화권을 형성해 왔음에 대해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13)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말해주더라도,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보지 못하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14) 기독교가 세계관의 일종이기도 하다는 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체스터턴의 보물선 비유를 이야기 해주면 좋다. 보물의 용도에 대해 철학은 인간 자신의 사고에서 추론을 시작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위에서 부터 주어졌다고 믿는 계시에서부터 추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15) 네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①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객관적인 삶의 기준과 도덕법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② 그런 것은 없다고 판단을 내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기준을 설정해서 삶을 꾸려나가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③ 그런 것이 전혀 없다고까지는 자신하지 못하지만, 크게 나쁜짓 하지 않으며 나름대로 삶의 기준을 세워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④ 그런 것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확장해보지도 못했고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인지 못한 채 살아온 사람이 있다.

  ①, ②는 사고 수준이 꽤 되는 사람이고, ③은 일반적인 현대인이다. 그리고 ④는 지적수준이 사춘기 이전에 정체되어 있는 사람의 경우다.


(16) 기독교 교리의 내용을 논리적 순서에 따라 배열해 보면 결국 제일 앞에 오는 것은, ① 인간을 포함한 온 세상을 창조하였으며, ②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예배받기 원하는지를 성경이라는 '책'을 통해 드러내기 원해왔고 또 그 드러내는 일이 확실히 벌어지도록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17) 성경에 기초하여, 이 세상은 왜 존재하고, 선과 악의 판단기준은 무엇이며,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탐구하여 밝히는 학문을 기독교 철학이라고 했을 때, 기독교 철학은 인간을 포함한 온 우주는 본래는 없었으나 지금은 다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