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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님의 블로그
오늘날의 교사는 대부분 20년 전의 학부생…입니다. … 우리는 각 세대가 그 이전 세대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부터 우리는 교육에 대한 허튼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현대 청소년들의 견해들을 논하면서 그것들이 마치 현대 청소년들만의 어떤 특이성에서 저절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들은 이제 중년이 된 지난 세대의 청소년들이 교실을 장악하면서 뒤늦게 남긴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많은 교육 계획들이 실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세대가 갖지 못한 것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각기 원하는 대로 교과 과정을 짤 수 있습니다...
(1) 형법의 대원칙으로 책임주의라는 것이 있다. 이때의 책임주의는 범죄를 저지른 크기에 상응하는 형벌이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구체적인 범죄들을 살펴보면 좀 애매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① 범죄자가 범행을 통해 얻으려 했던 이익(혹은 쾌락)의 크기와 ② 범죄자가 범행시에 피해자에게 가할 의향이 있었던 피해의 크기, ③ 범죄 피해자가 입은 피해의 크기 중 무엇을 '범죄를 저지른 크기'로 파악할 것이냐하는 것이다. 물론 형법학은 형벌론보다 범죄론에 좀 치중된 관계로 이런 논의는 잘 보이지 않는다. 강간죄의 처벌에 대해 말들이 많다.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실제 사건에서 강간 피해자가 입은 피해는 매우 어마어마한데 반해, 강간범이 강간시에 얻으려 했던 쾌락의 크기나,..
[천천히 조금씩 써 나가 보자. 증거주의, 전제주의 이야기가 있지만 잘 정리 해보자.] 1. 여기서 말하는 "신"이란 이 물질 세계와는 구분되는 존재하면서, 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낸 존재를 말한다. 2.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어렵거나 석연치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는 자연스럽게 설명되는 그런 증거들을 말한다. 그런데 만약 무언가가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서 제시되었다고 해보자. 이 때 생기는 타당한 의문은 이런 것이다. '지금 내 머릿속에서 금방 떠오르는 다른 방식으로는 저 증거가 잘 설명이 되지 않지만, '설명'이라는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니까, 인간 머리의 한계 때문에 더 좋은 다른 설명을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어떤 사회 안에서 기독교가 작동할 때는, 그 사회의 지적 수준에 따라 그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중세 유럽에서 나타났던 미신적인 해석들과, 일상의 모든 것들에 성경의 구절들을 끌고 들어와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던 해석 방식들이,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에서도 벌어졌고, 최근 아프리카와 남미에서 또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심지어 17, 18세기 청교도 사회에서도 벌어졌던 일들이다. 학문하는 방법론이나 철학적 수준이 성경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19~20세기 구미(歐美)에서는 회의주의로 범벅이 된 각종 비판적 해석들이 난무했다. 그리고 21세기인 지금도 이러한 회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 대한 적은 이해와 지식만을 가지고서도 일하시는 분이지만, 성경 전체는 ..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이 부분은 기독교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있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자주 잘못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있어서 만큼은 유대교인들이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이 신음하며 하늘에서 임할 구원을 기다리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밭과 타작마당, 산천의 나무들이 모두 그런 상태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세상은 아직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일부분만 이루어졌..
나는 개인적으로 데살로니가후서 1장 7~9절이 매우 소중하다고 본다. 프란시스 쉐퍼 덕분인지, 아브라함 카이퍼 덕분인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얘기들이 기독교 청년들과 선교 단체에서 무성하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성경 구절을 모르기 때문에(혹은 확실하게 고정시켜두지 않았기 때문에) 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허튼 소리들을 하게 되는 것을 본다. "주 예수께서 자신의 능력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불꽃 가운데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얼굴과 그분의 능력의 영광에서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의 복음주의자 대부분은 신앙을 철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수입한 상식적 실재론(Common Sense realism)을 활용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의 지성계 전반에 굉장한 영향을 끼친 철학이었다. … 심지어는 토마스 제퍼슨처럼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 요소를 모두 부인하는) 이신론자들조차 받아들였다. … 상식적 실재론은 19세기 미국의 공식철학으로 불려왔다. … 미국 역사의 이러한 측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는 데카르트, 칸트, 헤겔 같은 위대한 유럽의 사상가들에 관해 읽었다. 그러나 미국을 한 세기 이상 지배했던 그 철학에 대해서는 읽은 적이 없다. 이는 놀랄 만한 실책이며, 미국 역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메워야 할 간극이..
휫필드와 다른 부흥사들이 직접 기록한 이야기를 읽어 보면,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뜨거운 사랑과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불러들이려는 간절한 열망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의 반지성주의를 단호하게 진달하려 한다면, 중요한 씨앗이 이미 뿌려지고 있었음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대각성운동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이 당시에 왜 그처럼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제1차 대각성운동 때 장로교를 비롯한 일부 교회가 실질적으로 부흥회파와 신앙고백파로 분열되었고, 동시에 어떤 집단들은 완전히 떨어져 나가 독립 교단이 되기도 했다(침례교회가 종종 그랬다). 그 두 진영을 갈라놓은 것은 회심시 감정이나 체험의 역할을 둘러싼 의견대립이었다. 대각성운동에..
토마스 홉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정치질서의 궁극적 기초라고 주장했다. … 개개인이 자기 방어권 같은 특정한 권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그것을 시민 당국에 양도한다면 더 유쾌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결정하는 시점에서 국가가 발생한다고 보았다. 이 같은 권리의 양도를 계약이라 하며, 홉스에게는 이것이 모든 도덕적 의무의 기초가 된다. … 존 로크도 이와 비슷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차이점은 사회질서의 궁극적 기초를 굶주림이라고 본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먹을 권리이며, 죽음의 위협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에서 온다. 개인들은 먹을 것으 찾거나 스스로 재배하기 위해 노동하다 보면 사유재산을 창출하게 되는데, 자기 재산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과 사회계약을 맺게 된다..
실제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철학적 입장은, 서구문화가 동틀 무렵에 등장한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로든 발견할 수 있다. … 사실, 이미 옛날에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에 기초한 하나의 완전한 세계관을 그려 냈다. … 이런 생각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 고대 세계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헬레니즘 시대가 지나가고 다시 한번 고전사상(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 철학계를 휩쓸었는데, 그 추종자들은 에피쿠로스의 유물론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들의 주장은, 만일 세계가 정말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면, 지식은 불가능하리라는 것이었다. 감각을 통해 우리 정신에 유입되는 끊임없는 인상의 흐름은, 그 어떤 이성적 패턴으로도 정돈할 수 없으며, 순전히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등의 무의미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