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Ⅳ 본문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려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이 아들을 기뻐하니, 너희는 이 아들의 말을 들어라."
1.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권능으로 붙들어 주시고 자신의 섭리로 다스리시며 또한 자신의 선하심으로 보호하시고 온갖 축복으로 채워 주신다고 느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화목의 은혜(gratiam reconciliationis)를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generali scripturae doctrina)이 가르쳐 주고 있는 대로, 우주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단지 자신을 창조주가 되심으로 나타내어 보여 주신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얼굴(참조. 고후 4:6)에서는 구속주가 되심으로 나타내 보여 주신다. 이로 말미암에 하나님에 관한 이중적인 지식(duplex cognitio)이 생겨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사망으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창조주(creatorem)로서뿐만 아니라 구속주(redemptorem)로서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존 칼빈,『기독교 강요1』,기독교문사 刊, pp.112, 167]
2. 전도 설교란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선포입니다.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전도 설교를 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존재와 능력과 영광을 선포해야 합니다. … 전도 설교는 하나님에 대해 전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하여 우상의 공허함과 허무함과 쓸모없음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율법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려면 하나님의 율법을 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보게 해 줍니다. 모든 율법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또한 전도 설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주로 믿는 자리까지 사람들을 이끌어 가야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메시지이며, 이른바 전도 설교 입니다. [로이드 존스,『설교와 설교자』, pp.96 ~ 97]
3. 죄가 인류에게 들어온 것이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해서 한 가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와 미움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확신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관심을 갖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제입니다. 오직 우리가 죄의 악함을 보았을 때에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시각이 우리의 시각과 왜 그렇게 다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존재의 모든 강렬함으로 의를 사랑하십니다. 의를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 반대의 것을 미워한다는 말입니다. [이안 머리,『오래된 복음주의』, p.137]
4. 현대 교회는 구원이 단지 영생을 주는 것일 뿐 죄인들을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의 삶을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진리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영원한 고통으로 징벌하시기도 하신다.
… 사람들이 자기 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해답을 찾기 위해 나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리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치료를 받으러 나오지 않는다. 자기들이 죽음의 형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생명을 얻기 위해 나오지 않는다. 자기들이 죄의 사슬에 매여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구원을 얻기 위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오셨다. [존 맥아더,『참된 무릎 꿇음』, pp.113 ~ 115]
… 사람들이 자기 죄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에게서 해답을 찾기 위해 나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리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치료를 받으러 나오지 않는다. 자기들이 죽음의 형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생명을 얻기 위해 나오지 않는다. 자기들이 죄의 사슬에 매여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구원을 얻기 위해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오셨다. [존 맥아더,『참된 무릎 꿇음』, pp.113 ~ 115]
5. 개인의 죄를 깨닫는 것은 구원의 진리를 이해하는 데 필수 요소다. 사람은 심리적 필요와 염려, 불안, 소망 없음, 슬픔, 또는 행복 추구 같은 동기만으로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을 요청할 수 없다.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구원은 자기의 죄를 싫어하고 그러한 모든 삶에서 돌아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또한 자기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반역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돌이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 복음 전도는 죄인에게 자신을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비추어 보게 함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볼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저 인간의 필요와 인간의 감정과 인간의 문제만을 다루는 복음은 균형을 잃어 버린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교회에 회심했다고 말하면서도 근본적으로 삶의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된 이유다.
… 죄의 실재와 심각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들에게 영원한 고통의 형벌을 주신다는 사실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 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은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기의 죄악을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가 없다. [존 맥아더, 『참된 무릎 꿇음』, pp.153 ~ 155]
6. 어려서부터 교회에 출석한 사람들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기독교는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이해가 자신의 자아정체성과도 결부된다.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기 전부터 교회에 출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형성된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한 이해는 매우 공고하다. 기독교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매우 '완고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자신이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한 믿음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에 토대를 두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기도하는 것들에 응답해주시고 그들의 인생을 인도하여 주신다. 이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설교 중에도 이에 대한 별다른 지적은 받아온 바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에 토대를 둔 기도에 응답하셨으며, 그런 믿음에 토대를 둔 나의 인생을 인도하셔왔다. 나는 이 믿음을 사랑하고, 이것은 나이며, 나의 정체성이다.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하나님은 없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에 관심이 있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나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세상의 쾌락을 여전히 좋아하고 게으르고 나태하며,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부분에서 문제가 있을 뿐이다. 내가 신학자들처럼 교리를 알지는 못하지만 내 믿음의 내용은 문제가 없고, 다만 실천의 영역에서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문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고, 거듭남이 있는지 여부를 판가름 하는 것은, 회심이 있었는지 여부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 없이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최고로 삼는 가치질서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치질서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① 우리가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죄악의 상태에 있다는 것과, ② 나에 대한 그 진노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가자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
단순히 아버지 같은 자애로우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날 천국에 있지 못한다. 또한 심각한 것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안에 넘치는 기쁨을 인하여"와 같은 신약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 된다는 데 있다. 이것들은 거듭난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구절들이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의 신앙의 내용의 올바름을 인증해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 신앙과 믿음과 경험과 삶은 무엇인가? 다 틀렸다는 말인가?" 아니다. 다 맞고 다 잘했다. 그 모든 것들은 느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베푸시고 행하신 것들이 맞다. 당신이 거기서 추가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금의 상태에 머무르지 말고,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에게 다가오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추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일을 지속하도록 하자. 하나님께 우리의 죄인됨을 보여달라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도록 하자. ① 우리 자신의 죄악됨과 비참함, ②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의미, ③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또 우리가 그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자. [유대웅]
"지금껏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기독교는 이런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설교 중에도 이에 대한 별다른 지적은 받아온 바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믿음에 토대를 둔 기도에 응답하셨으며, 그런 믿음에 토대를 둔 나의 인생을 인도하셔왔다. 나는 이 믿음을 사랑하고, 이것은 나이며, 나의 정체성이다.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고, 하나님은 없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들을 말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에 관심이 있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나는 잘못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세상의 쾌락을 여전히 좋아하고 게으르고 나태하며,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 부분에서 문제가 있을 뿐이다. 내가 신학자들처럼 교리를 알지는 못하지만 내 믿음의 내용은 문제가 없고, 다만 실천의 영역에서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문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어야 하고, 거듭남이 있는지 여부를 판가름 하는 것은, 회심이 있었는지 여부다. 하나님에 대해 관심 없이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최고로 삼는 가치질서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치질서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① 우리가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시는 죄악의 상태에 있다는 것과, ② 나에 대한 그 진노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가자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꼭 포함되어야 한다.
단순히 아버지 같은 자애로우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가장 높으신 분이라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날 천국에 있지 못한다. 또한 심각한 것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안에 넘치는 기쁨을 인하여"와 같은 신약 성경의 수많은 구절들이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 된다는 데 있다. 이것들은 거듭난 신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구절들이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았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의 신앙의 내용의 올바름을 인증해주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 신앙과 믿음과 경험과 삶은 무엇인가? 다 틀렸다는 말인가?" 아니다. 다 맞고 다 잘했다. 그 모든 것들은 느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베푸시고 행하신 것들이 맞다. 당신이 거기서 추가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지금의 상태에 머무르지 말고,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에게 다가오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추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일을 지속하도록 하자. 하나님께 우리의 죄인됨을 보여달라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도록 하자. ① 우리 자신의 죄악됨과 비참함, ② 성육신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의미, ③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또 우리가 그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하자. [유대웅]
7. 온 우주와 만물의 통치자와 주권자가 되시는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라는 말은 반만 맞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앙만으로는 우리는 지옥 불에 던져지는 형벌을 면할 수 없다.
철학적 유신론 뿐만 아니라, 경험적 유신론도 기독교는 아니다.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해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 그리고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즉, 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죄인인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 그리스도가 그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유대웅]
철학적 유신론 뿐만 아니라, 경험적 유신론도 기독교는 아니다. 우리의 죄와 그로 인해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 그리고 그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즉, 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죄인인 우리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 그리스도가 그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유대웅]
8. 복음의 일은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심리학도, 이단 종교도 합니다. 복음이 다른 모든 가르침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선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개별적인 문제들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공통된 문제,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법 앞에서 죄인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이안 머리『오래된 복음주의』, p44.에서 재인용]
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형통과 번영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스러운 배우자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죄사함의 문제를 집요하게 다루신다. 당신께서 판단하시기에는 앞의 문제들 보다도 이 문제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직장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고, 등록금이 필요하고, 배우자의 질병이 낫고, 부부간에 화목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꾸 딴 소리를 하신다. 우리는 키가 5cm만 더 커졌으면 좋겠고, 살이 5kg만 더 빠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눈가의 주름이 없어졌으면 좋겠고, 피부에 탄력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고 정력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큰 딸이 상반기 공채에 합격했으면 좋겠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우울증에 빠진 둘째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백혈병에 걸린 엄마가 병을 이기고 정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알콜에 중독된 아빠가 엄마를 그만 때렸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문제이고, 다음 달 난방비가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시는 것마냥 딴소리를 하신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행복해하는 것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시는 분으로서 생각하거나 신앙과 우리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이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신앙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실효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상의 모든 것들 때문에 곤란을 겪는 다는 것과, 그것들이 해결 될 때 우리가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그것들보다는 죄사함의 문제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유대웅]
우리는 직장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고, 등록금이 필요하고, 배우자의 질병이 낫고, 부부간에 화목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꾸 딴 소리를 하신다. 우리는 키가 5cm만 더 커졌으면 좋겠고, 살이 5kg만 더 빠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눈가의 주름이 없어졌으면 좋겠고, 피부에 탄력이 좀 더 있었으면 좋겠고 정력이 더 좋아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큰 딸이 상반기 공채에 합격했으면 좋겠고,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우울증에 빠진 둘째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백혈병에 걸린 엄마가 병을 이기고 정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알콜에 중독된 아빠가 엄마를 그만 때렸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문제이고, 다음 달 난방비가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시는 것마냥 딴소리를 하신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가 행복해하는 것을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시는 분으로서 생각하거나 신앙과 우리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이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신앙이 우리의 실제 삶에서 실효적으로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상의 모든 것들 때문에 곤란을 겪는 다는 것과, 그것들이 해결 될 때 우리가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어, 그것들보다는 죄사함의 문제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유대웅]
10.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시고,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심각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긴요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가치판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고, 지적으로만 동의하거나 마음으로 거부하는 것이 어른같은 마음이다. [유대웅]
11. 나사렛 예수는 성삼위 하나님의 복 되신 두 번째 위격이십니다. 그 성자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여러분과 저의 고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비참함과 불쌍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와 수치와 실패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서 거룩하고, 흠없고, 죄없는 자기 몸에 여러분과 저의 죄를 짊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거기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족하셨고, 율법이 충족되었으며, 지옥과 사탄이 패하고 정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새 생명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하고, 중생해서, 새로운 힘과 능력을 얻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 영원이라는 무궁 무진한 세월 동안 영적인 젖과 꿀을 마시며 살 수 있다는 복된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로이드 존스, 『구약을 사용한 복음설교』]
12. 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목수로서 미천한 삶을 사셨다는 사실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워 온갖 수모를 다 참아 내셨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정말 무의미하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고, 영적으로 죽었으며,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다고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내가 자랑하는 복음』, p.197]
13. 삶이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접근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의 몇 가지 대답을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 인생관이 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그들의 인생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바울 당시에도 이것은 아주 익숙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삶 자체보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곧 즐기는 것입니다. 스토아주의 인생관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적(知的)이기에 현실이 전혀 멋지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세상은 눈물로 가득 찰 때가 많다는 것을 압니다. 삶에 대한 스토아주의자의 태도는 꿋꿋이 참는 것이며 결연히 버티는 것입니다. 냉소적인 인생관도 있습니다. 특히 살기가 힘든 요즘 같은 때에는 늘 그렇듯이 냉소적 인생관이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이런 인생관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요! 높디높은 이상주의가 무너지고 밝게 빛나던 희망이 수도 없이 박살나 버린 이런 시대에는 특히 더 이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하는 말은 "그래 봤자 뭐해? 다 쓸데없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인생관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붙잡고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자신에게 삶이란 가족과 가정, 일과 직업, 삶의 여러 가지 활동을 의미한다고 인정하며 고백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아닙니까? 우리 대다수에게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교제와 사랑, 가정생활과 교우관계를 의미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종 그런 것들 "자체"가 삶이 되어, 그런 것들을 잃으면 삶과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본주의적인 관점도 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에게 산다는 것은 선을 행할 기회, 세상을 개선하고 사회의 상태를 향상시킬 기회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이상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물으면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고 진보시켜서 향상시킬 기회"라고 대답합니다. … 그리스도인에게 삶은 곧 "하나님"이 아닙니다. 불경하고 과한 말로 들립니까? 지나친 말로 들립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 아니라 성자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 사랑과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또 다른 말은, 누구나 채워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요구가 생기게 마련이고, 찾는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평안과 기쁨을 찾게 마련이고, 행복을 찾게 마련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워주신다고 말합니다. "내게는 지성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채워 주신다"라고 말합니다. "만족되어야 할 감정과 갈망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나의 전부가 되어 모든 것 안에 충만히 계신다"라고 말합니다. "내 삶의 모든 요구는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도록 채워진다"라고 말합니다. 이 또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에 담긴 의미 입니다.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히 반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성적인 요구와 개인적인 요구가 전부 채워지고 충족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면 계속 이 질문만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입장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분은 바로 그리스도십니다.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이 모든 의미에서 바울에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로이드 존스,『빌립보서 강해』]
14. 결국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글자'를 읽고 있는 당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다가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대웅]
15.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① 어떤 실제적인 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나야 하며, ② 여러분이 철저히 여러분의 죄와 비참에 대해 깨달으며, ③ 죄의 심각한 악을 보며, ④ 죄를 슬퍼하며, ⑤ 무엇보다 죄를 미워하며, ⑥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에 대한 감각이 생기며, ⑦ 여러분의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며, ⑧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즐거움보다 거룩하게 되는 것을 즐거워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고별설교』]
16. 우리는 회개해야 하지만, 회개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회개하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유대웅]
17. 나는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믿는 부모에게 양육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이런 감사하고 온화한 환경 덕택에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거나 추악한 행동을 저지르지 않고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고막이 터질 듯한 시내산의 천둥소리에 덜덜 떤 적도 없고, 그 소리에 마음속 깊이 죄를 자각한 적도 없었다. 나는 십계명의 마지막 여섯 가지 계명에 대해 자신감을 보인 젊은 관원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늘 살았던지라 정결함 그 자체이신 주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 : 20)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시내산 자락이 아니라 성 밖의 황폐한 골고다 언덕에 의식적으로 섰을 때, 그래서 십자가의 수욕과 고통의 비밀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을 때, 자신을 희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자신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을 때, 내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그 사랑 안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고, 빛을 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티끌처럼 작아졌다. 나의 슬픈 마음은 기도하기를 갈망했지만,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주님이 나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형언하기 어려운 사랑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죄가 지난날의 우발적인 비행(非行)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자아 중심'이라는 나의 본질적인 태도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랑의 빛 안에서 깨달았다. 그렇다. 내가 손을 입술에 대고 "나는 부정한 죄인입니다! 나는 부정한 죄인입니다!"라고 흐느낀 것은 예수님이 나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데려가셨을 때이다. 나는 기도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감히 입을 열어 기도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런 사랑을 향해 아무것도 구할 자격이 없는 죄인의 처지였다. 내가 그런 사랑 앞에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에 관한 계시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다. [캠벨 몰간(Campbell Morgan), 『기도 바이블』(THE PRACTICE of PRAYER), pp.45 ~ 46]
18. 회개는 ①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악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② 당신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 ③ 그리고 당신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④ 또한 회개는 죄라고 불리는 것이 당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여, ⑤ 그것을 제거하길 바라며 ⑥ 그 죄의 모든 모양과 형태로부터 돌아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세상, 곧 마음 속에 있는 세상이나 실제 세상을 포기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온 세상이 당신을 바보라고 부르거나 당신이 광신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달리질 것은 없다. 그것이 바로 회개다. [로이드 존스, 『Studies in the Sermon on the Mount』, p.248]
19. 우리의 허물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그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가 그 허물을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분께 기도드리자. 그리고 그분의 죄사함을 구하고 우리 자신을 미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자.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어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우리가 모든 거룩함과 그분의 의에 대한 순종으로 더욱 나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자. [존 칼빈]
20. 오늘날은 무신론과의 대립으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을 기독교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알고 당신을 믿기 원하신다.
21.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심으로 먼저 충격을 받고(ante perculsus) 압도 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도 우리의 마음이 생명을 열심히 붙잡지 않거나 생명을 받았으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없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은 말하자면 우리의 원수가 되시며 그의 손은 우리를 멸망시키시 위해 무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아버지와 같은 사랑(paternam caritatem)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존 칼빈,『기독교 강요2』, 기독교문사 刊, pp.462 ~ 463]
22.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까지는 쉽게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죄인 됨을 실제로 문제삼으신다는 것을 받아 들이는 일이다. 오늘날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자녀들에게 따듯하고 친절하다. 이것이 후자를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다.
23. 처음에 기독교 운동은 그것을 반대할 특별한 이유가 없는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반대하지 않은 자는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입니다(눅9:50).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측면들과 기독교의 다른 점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기독교가 내세우는 주장의 진정한 의미와 전인격적 항복에 대한 요구,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분명한 간격이 선명하게 드러남에 따라, 사람들은 점점 '기분이 상합니다'. 반감, 공포, 마침내 증오가 생겨납니다. 기독교의 요구 사항(기독교는 전부를 요구합니다)을 내놓지 않으려는 사람은 누구도 기독교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것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눅 11:23). [C. S. 루이스,『피고석의 하나님』,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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