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Ⅱ 본문
[작성 중. 오타도 좀 있고, 다듬어야 할 문장도 많다. 그리고 성경의 신뢰도에 대한 내용이 더 많이 추가되어야 한다.]
1. 지금까지는 온 세상의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이 두 번째 글에서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한 창조자로서의 신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 서 있는 사상 체계는, 기독교 외에도 어려 가지가 있는데 '왜 하필 기독교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대답입니다. 유대-기독교의 신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나 북유럽 신화, 페루 신화, 이집트, 바빌로니아 신화에서 말하는 신은 왜 되지 않는가? 혹은 우리가 아직 미처 발견하지 못한 신이 진짜 창조자일수는 없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성경에 대해 다루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성경 위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수많은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신들 중 왜 하필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어야 하는가 하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선결적으로 성경은 믿을만한지를 먼저 다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그보다도 먼저 종교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을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논의 순서는 ① 종교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 → ② 성경의 신뢰성 → ③ 왜 하필 기독교이어야 하는가가 되겠습니다.
2. 먼저 종교 다원주의를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2-1.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들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기보다 서로 배치되는 믿음을 갖고 있다. 모든 종교의 기본은 같은 것—이를 테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처럼—을 가르치고 있다는 관념이야말로 세상의 종교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신의 본질, 인간의 본질, 죄, 구원, 천국, 지옥, 그리고 창조를 포함하여, 사실상 모든 중요한 주제에서는 그들 종교 사이에 일치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는 종교적 불관용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으며 다른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이 곧 ‘모든 종교적 믿음은 진리’라는 불가능한 개념을 우리 각자가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많은 사람들의 견해와 달리, 세계의 주요 종교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겉보기에만 같은 점이 있을 뿐이지 본질 면에서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많은 부분 서로 상반되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어서, 모든 종교가 동시에 진리일 수는 없다. [노먼 가이슬러 ‧ 프랭크 튜렉, 『진리의 기독교』, pp.86~95]
2-2. 사람들은 흔히 종교는 그 내용은 다 똑같은데 종교적 의식들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종교들은 그 내용은 크게 다르고, 의례나 형식들이 유사합니다. 제단이 있고, 예배가 있고, 노래가 있고, 교리가 있고, 특별하게 구별된 장소가 있고, 사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내용에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2-2-1. 윤리 공동체와 종교회의에서 거듭해서 거론되는 공평무사한 말이 있다. "지구상의 종교들은 그 의례와 형식은 다르지만 가르치는 내용은 똑같다"는 말이다. 이는 오류다. 이는 사실과 정반대되는 소리다. 지구상의 종교들은 의례와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가르치는 내용이 크게 다르다. … 지구상의 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는 제사장, 신성한 경전, 제단, 형제의 맹세, 특별한 축제 등 똑같은 외적인 방법을 갖고 작동한다. 가르치는 방식도 비슷하다. 그런데 그들의 다른 점은 바로 그들이 가르치는 내용에 있다. [G. K. 체스터턴,『정통』, pp.255 ~ 256]
2-3. 기독교는 분명 배타성을 띤다. 기독교가 배타성을 띠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배타성(排他性)을 띠는 이유는 그들이 ① 진리는 오직 하나 뿐이고, ② 그 진리가 오직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한 목수의 아들의 인격 안에만 온전히 체화(體化)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생기는 것이지, 배타성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을 진리라고 믿는 사람의 인격을 배척(排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는데, 진리가 오직 하나 뿐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진리가 배타성을 띠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진리가 하나라는 것은 그 진리가 아닌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배타성을 문제 삼으려는 사람은 기독교의 배타성 자체를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진리가 하나라는 그 전제를 문제 삼아야 한다. 진리는 하나이고, 자신이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곧 바로 그 생각은 배타성을 띠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두 가지는 결합되는 순간 배타성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라고 주장되는 어떤 내용이 배타성을 띠지 않으려면 ① 진리가 하나뿐인 것은 아니라고 믿어야 하거나 ② 자신이 믿는 내용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전제 중 어느 하나도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또한 만약 진리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 "진리"(眞理, Truth) 개념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된다. 굳이 진리라는 말을 꺼낼 필요가 없다. 여기도 진리 저기도 진리라면, (진리라고 주장되는) 어떤 하나의 기준에 맞춰서 다른 것들이 굴복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삶에서 "진리가 작용할 수 있는 국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상과 결국에는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2-4.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을 칭송하는 위선을 보이면서도, 정작 진리를 찾았다고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개 처형을 요구합니다" [폴 워셔]
2-5. 문화 상대주의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여러 개라는 것과 ② 그 여러 개가 대등하게 병렬적인 가치와 지위를 가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동양문화와 서양문화는 분리 될 수 있는 개체이며, 분리될 수 있는 이 두 가지 문화는 대등하게 병렬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당연한 것들이 아니다.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것들 절대시하는 것 역시 근거 없는 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문화 상대주의에 대한 힘을 빼고 공정하게 생각하도록 하자.
2-6. 현대의 사상은 서로 다른 문화들 간의 윤리적 차이를 매우 심각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같은 생각이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한 민족의 생산 방식, 경제 조직, 지리적 위치가 그들 전체의 도덕관과 철학관을 모조리 설명할 수 있다는 견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에서는 민족마다 언어와 옷차람이 다른 것처럼 이데올로기도 때로는 상당한 정도까지 다르리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발견하는 바도 그러합니까? 많은 인류학적 지식에 따름녀 일단은 그렇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결코 전문가라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과감히 견해를 밝혀 본다면, 인류학이 주는 그와 같은 인상은 어느 정도 착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런 인상은 각 문화에서 가장 변하기 쉬운 바로 그 요소들(성 관습이나 종교적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또 미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얻은 결과입니다. 심지어 일부 사상가들은 그 미개인을 표준적이거나 원형적인 인간으로 다루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 미개인은 분명 예외적인 인간입니다. 우리가 한때는 아기였던 것처럼 우리 모두가 한때 미개인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수 있습니다. 미개인에게도 문명인만큼이나 많은 세대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도 그 지적 상태가 요람에 있었을 때 그대로라면 우리는 그를 정상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 미개인의 규범이 갖는 다양성과 독특성 ― 이 또한 종종 과장됩니다 ― 에 우리가 왜 그토록 많은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우리의 관심을 문명인으로 돌린다면 윤리적 명령들 간의 차이가 현재 사람들이 널리 믿는 바보다 훨씬 크지 않음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없어서는 안 되는 똑같은 진부한 명령들이 위압적으로 단조롭게 펼쳐지는 것을 보게될 것입니다.
… 도서관에 가서 《종교와 윤리 백과사전》(Encyclopedia of Religious and Ethics)을 보며 며칠을 보낸다면 누구나 일간의 실천이성이 방대한 합의를 이루고 잇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것입니다. 바벨론 시대에 기록된 《사모스에 대한 찬가》(Hymn to Samos), 마누법전, 《죽은 자의 책》, 논어, 스토아학파, 플라톤주의자, 호주의 원주민과 아메리카 인디언 모두가 한결같이 억압, 살인, 반역과 거짓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한편으로는 노인, 아이, 약자에 대한 친절과 자선, 공평, 정직을 명령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물론 스물까지 수를 세지 못하는 미개인이 존재하듯이 특정 문화들에는 눈먼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 그저 혼돈만 주어진 것처럼 처신하는 것은 거짓에 지나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 맞딱뜨리더라도 반박해야 할 태도입니다. [C. S. 루이스,『기독교적 숙고』, pp.100 ~ 102, 141 ~ 142]
2-7. 17세기 영국의 허버트(Herbert of Chebury)는 참된 종교는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보편적이라는 것은 모든 이들의 충성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자연스러운 종교이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참된 종교는 어떤 경전이나 역사가 흘러온 과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 본능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교양있게 배운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생각이다. (물론 대부분은 논리적으로 깊이 있게 사고한 끝에 가지고 있는 견해는 아니다. 이 주제에 대해 많은 관심이 없다.)
그러나 묻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이 유대-기독교의 주장처럼 특정한 집단에 특별히 더 많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드러냈다고 볼 수는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는 차원에서는 이것이 공평에 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틀렸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3. 그 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것은 포이에르 바하에 의해 유명하게 된 투사론입니다. 포이에르 바하는 사람들이 불안정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의지하고 싶은 가상의 대상을 설정하고, 그것에 자신들이 소망하는 내용을 투영하는 것이 점차 발전해서 오늘날의 종교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현대의 교양있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주장은 이미 예수님 당시부터 존재하던 것이라는 점입니다. 켈수스(B.C. 30 ~ A.D. 45)가 살아 있던 시절부터 기독교는 무지하고 교양 없는 자들, 여성, 아동, 장애인, 노예들의 종교였습니다. 그 점 때문에 켈수스는 기독교를 비난했습니다. 제대로 사고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믿을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자체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린도전서 1장 26절)
그러니까 교회에는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 중에 하나가, 사람은 누구나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필요한데, 이런 사람들은 더더욱 필요하니 더더욱 이런 사람들이 모이게 된 것이라는 점도 진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러니까 신은 없다'로 넘어가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논리 필연적으로 '신이 없다'는 결론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없다고 본다면, 기독교나 여타 종교에 몰두 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사회적인 약자나 인생의 비전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현상이 제대로 설명된다고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논리의 구조가 어떠한지 보이십니까? 앞에서 이미 여러번 언급한 것과 같이, 귀추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세계관의 안경을 쓰고 종교 현상을 바라 보았을 때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신론의 세계관으로 종교를 바라 본다면, '투사론'이 제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리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앞에서 역시 같은 방식인 귀추법에 의해, 현존하는 온 인간의 머리를 합쳐도 이해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세상을 창조한 신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서 소위 '투사론'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투사론은 정말 설득력이 있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미 귀추법에 의해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논리를 뒤집어서는 아니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3-1.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 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기독교의 이해입니다. 거꾸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신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의 안경을 쓰고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언급한 것이기 때문에, 귀추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까지는 켈수스나 포이에르 바하의 해석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아니면, 바울의 해석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넘어 가고자 하는 것은, 종교는 오직 감정의 영역과 관련된 것이라는 생각이나, 종교는 의지할 데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수단이라는 생각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근거로 신은 역시 없다는 생각은 잘 못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4. 그 다음으로 이야기 할 것은 ① 온 세상의 창조자가 존재하고 ② 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상 체계들이 서로 양립불가능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③ 여전히 '왜 하필 기독교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성경에 있습니다. 왜 하필 기독교이어야 하냐면 그것은 기독교가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래에서는 우리는 왜 성경적이어야 하는지와 성경적인 것이 왜 진리성을 나타내는 건지에 대해 답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4-1. 그에 대한 대답은 성경이 기독교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기독교가 성경에 토대를 두고 구축된 세계관 내지 종교 내지 사상 체계이기 때문이지만, 어쨌든, 성경 때문에 '꼭 기독교이어야 한다'는 것이 이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무엇이기에 반드시 기독교만이 진리라는 것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것일까요?
4-2. 우리가 성경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과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을 개소리로 여기든지 진실이라고 여기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두 선택지 모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간접적인 근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은 경험적 검증 바깥에 있는 주장이기 때문에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이것을 믿든지 말든지 둘 중 하나를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정적으로 어느 한쪽을 부인할수있게하는 그런 류의 증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도 세계관의 문제와 비슷해 보입니다.
4-3.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성경의 기록된 내용이 온 세상을 창조한 창조자의 말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경의 주장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근거입니다. 좀 당혹스러울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럼 내가 아무 소리나 공책에 적은 다음에, '이것이 온 세상을 창조한 자의 말이다.'라고 부기해 놓는다면, 그 공책은 온 세상의 진리라고 믿을 만한 내용을 담은 책이 되는가?'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두 가지 중 하나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니오. 나는 이 기록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렇습니까? 나는 당신의 주장을 참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라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4-4. 논의를 심화시키기 전에 잠깐 다른 주제를 다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철학과 이성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창조세계라는 경험적 소재로부터 이성적 추론을 거친 결과물들을 진리로 여기면 안 됩니까? 이 세상도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이 세상을 살펴도 동일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바르게 추론할 수 있고, 이 세상이 충분한 경험적 소재를 제공한다는 한도에서만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즉,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진리에 이르도록 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와 이 세상이 우리가 진리에 이를 만큼 충분한 경험적 소재를 제공하는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지성의 눈멂 때문에 이 세상으로부터의 추론만으로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최고로 놓고, 그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다른 가능성을 열어 놓은 채 이런 이성적 추론의 결과물들을 수용합니다. 이미 추론 능력을 부정했으니 이 세상이 우리에게 충분한 경험적 소재를 제공하는가는 검토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우리가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중(二重)의 믿음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② 우리의 이성의 추론만으로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두 가지 말입니다.
4-5. 그렇다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갑시다. 기독교인들은 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을까요? 그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인데, ① 하나는 성경이 보존되어온 역사가 기이하다는 것이고, ② 또 다른 하나는 수백 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내용들이 실제로 수백 년 후에 성취된 일이 여러 번 있다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성경 자체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6. 물론 성경 안에는 자기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이 모두를 보존해 왔습니다. 어떤 무신론자는 이 부분이 기독교가 독특한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사람이 만들었다면 의도적으로 이 부분들을 개작을 하거나 제거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역시 어느 쪽으로도 설명이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4-7. 2세기 말까지는 지금의 성경 66권이 확정되지도 않았으며, 이 66권이 단일한 정경(canon, '규칙' 혹은 '표준'을 뜻하며, 공식적인 목록을 가리킨다)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이런 시간상의 차이가 발생한 것은 어떤 책을 정경에 넣을 것인가에 대한 합의 도출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따로 뜻을 모을 필요도 없었다. 어떤 책이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으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광범한 동의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급하게 그 목록을 형식화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단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이들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던 정경의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며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형식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주후 90년에 잠니아 회의(Council of Jamnia)에서 구약 정경이 확정되었으며, 신약 정경은 397년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e)에서 확정되었다. 하지만 분명 이전부터 구약과 신약 66권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 그래도 여전히 "맞아. 하지만 그건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성경 자체가 아니라, 정말로 성경이 있느냐 하는 거야"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즉 현재의 텍스트가 원본의 내용과 맞아 떨어지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수세기 동안 수천 번 필사된 고문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텍스트가 최초 문서의 내용과 완전히 똑같을까? 실제로 성경 저자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내용을 썼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에 대단 답은 간단하다. 어떤 고문서든, 그 완전성에 대한 판별은 현재 우리가 몇 개의 사본과 사본 일부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사본으로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9-10개 밖에 되지 않으며 그나마 가장 오래된 사본도 그가 생존했던 시대 이후 900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카이사르가 실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전제나 갈리아 전기 내용의 완전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역사가는 없다.
플라톤 저작의 경우도, 고대 사본 중 현존하는 것이 10개 미만이며 이 중 가장 오래된 사본이 최초 저작 시기 이후 1,400년이 지난 후의 것이다. 그런데도 「갈리아 전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저작의 역사성을 의심하거나 사본이 플라톤의 원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는 학자는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까?
신약 성경만 해도 헬라어 사본이 5천개 이상 남아 있고 따라서 이것으로 현재 성경의 정확성을 입증해 낼 수 있다. 초기 사본 중 다수가 원본 저작 시기와의 시간차가 25년에서 50년 정도에 불과하며, 900년과 1,400년이라는 긴 시간차를 가진 「갈리아 전기」나 플라톤 사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마태복음 일부가 포함된 그 유명한 모들린 파피루스(Magdalen papyrus)가 그중 하나다.
구약 성경 사본의 증거 역시 차고 넘친다. 특히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에는 그전에 나와 있던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보다 천 년 더 빠른 문서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구약 성경을 포함하고 있었다.
원문의 신뢰성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어떤 고대 문서들 보다 성경의 신빙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수의 역사성은 성경이 아닌 다른 역사 기록들도 증명하고 있다. 바로 1세기 그리스 작가 탈루스와 고대 로마의 행정관 플리니우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노티우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이다.
… 그렇다면 성경에 나온 그 모든 기적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사건들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닷물을 가르고, 빵 몇 조각과 생선 몇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였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야기 등 성경은 초자연적 사건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것 보세요. 그런 식으로 우주의 물리 법칙이 파괴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기적은 불가능하거든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단, 신이 없다면 말이다.
기적과 관련된 성경의 서술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신의 존재나 초자연적 영역을 믿지 않는 이들뿐이다. 신 존재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기적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 『성경은 믿을만 한가?』, pp.7 ~ 20]
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 추가로 봐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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