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Ⅲ 본문
[아직 다듬을 부분이 많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점은, 하나님이나 교회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이것입니다. 기존의 삶을 그대로 둔채로, 기독교를 거기에 추가로 장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0. 사람들은 흔히 어느 정도의 종교는 바람직하지만 그것에 너무 빠지면 안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실제로도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 '종교'에 함몰하여 자기 파멸의 길을 걸었고 또 지금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지금까지는 ① 창조자로서의 신이 있고, ② 그 신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이라고 믿을 만한 많은 이유들이 있음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성경이 인간에 대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성경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2. 다만 그전에, 영국의 로이드 존스(Lloyd Jones) 목사님이 생전에 남겨둔 설교가 있어서 소개하겠습니다. 논의를 본격화하기 전에 읽고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런 일”은 그냥 저냥 살아가다가 어떤 연유에서든 기독교 신앙에 주목을 하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2-1. 그 어떤 일은 아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일이란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우리가 말하는 "종교"에, 기독교 신앙에, 성경에 주목하게 만드는 그런 일입니다.
… 그런데 애석한 일은 이런 일이 많은 사람에게 일어났지만 그로 인해 회심까지 체험하게 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 저는 이런 사람들 대다수의 문제는 바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태도가 결국 실패의 원인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 만일 여러분과 제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줄 수 있는 축복에 대해 진심으로 알고 싶다면, 우리는 그 복음에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대신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만일 여러분이 제삼자적인 자세로 성경을 조사하는 단순한 조사원이나 검사관이라면, 여러분은 절대 성경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글쎄, 그 태도가 어떻단 말입니까? 왜 유독 이 문제들에 대해서만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다른 자세로 접근해야 한단 말입니까? 왜 나 자신을 순복시키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하는 한단 말입니까?"
… 첫째는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 복음은 주로 계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이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거의 다 조사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해 그렇게 잘못된 자세를 취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복음에까지 그런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현대인의 주장 아닙니까? 현대인은 이렇게 묻습니다. "모든 진리는 과학과 자연에 의해 연구 조사한 결과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계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검사나 탐색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욥 11 : 7). 절대 발견할 수 없습니다!
… 만일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가 아니라면 여러분에게 드릴 메시지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어떤 것들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입니다. 우리가 연구 조사하는 정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두 번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주어진 계시가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말 기이하고, 초자연적입니다. … 여러분과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초자연적인 것과 함께 시작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출발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머리로도 이해할 수 없으며 온 인류의 머리를 다 합쳐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독특하며 불가해한 것입니다. … 인간의 지성이 아무리 높고 훌륭하다 해도 그것은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세 번째 이유는 기독교 복음의 전체 요점과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기독교 신앙의 전체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대면시키는 것,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 이 기독교 복음은 어떤 관념이나 도덕 및 윤리에 관한 행동원리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개념이나 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대면하고 있는 그 문제는 지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여러분이 죄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제기하는 문제들은 학문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치명적인 경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 여러분이 조사하고 검사해서 그분을 이해하려고 하는 그 노력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나는 너의 우고(憂苦)를 알고, 나는 너의 불행과 실패를 알며, 나는 너에 관한 모든 것을 안다. 나는 사랑과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다."
… 그러나 소위 조사와 검사라는 제삼자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단순히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이것을 절대 알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니 멈춰 서서 듣기만 하십시오. 여러분의 발에서 신을 벗고, 자신의 지적인 교만을 버리고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자신을 어린아이처럼 낮추고 하늘에서 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들으십시오. [로이드 존스,『구약을 사용한 복음 설교』]
2-2. 삶이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접근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의 몇 가지 대답을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대다수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 인생관이 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그들의 인생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먹고 마시고 즐기자'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바울 당시에도 이것은 아주 익숙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삶 자체보다 하루하루 사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곧 즐기는 것입니다.
스토아주의 인생관도 있습니다. 그들은 지적(知的)이기에 현실이 전혀 멋지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오히려 세상은 눈물로 가득 찰 때가 많다는 것을 압니다. 삶에 대한 스토아주의자의 태도는 꿋꿋이 참는 것이며 결연히 버티는 것입니다.
냉소적인 인생관도 있습니다. 특히 살기가 힘든 요즘 같은 때에는 늘 그렇듯이 냉소적 인생관이 등장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이런 인생관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은 지요! 높디높은 이상주의가 무너지고 밝게 빛나던 희망이 수도 없이 박살나 버린 이런 시대에는 특히 더 이 유혹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하는 말은 "그래 봤자 뭐해? 다 쓸데없어"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인생관도 있습니다. "당신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삶을 이루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붙잡고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자신에게 삶이란 가족과 가정, 일과 직업, 삶의 여러 가지 활동을 의미한다고 인정하며 고백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아닙니까? 우리 대다수에게 삶이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교제와 사랑, 가정생활과 교우관계를 의미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물론 그런 것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종 그런 것들 "자체"가 삶이 되어, 그런 것들을 잃으면 삶과 세계 전체가 무너져 내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본주의적인 관점도 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에게 산다는 것은 선을 행할 기회, 세상을 개선하고 사회의 상태를 향상시킬 기회를 의미합니다. 이처럼 이상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물으면 "인류의 삶을 변화시키고 진보시켜서 향상시킬 기회"라고 대답합니다.
3.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이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1) 기존의 삶을 청산하고 2) 돌이겨 3)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리에서 4)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복되게 살라는 것입니다.
3-1. 성경은 인간과 생명과 사랑의 교통을 누리려는 목적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인간에게는 원래 의도된 지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자기 질서만을 강요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안 됩니다. 이게 진짜 좋은 것이기 때문에 부르시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우주에 하나님 밖의 행복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런 것은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밖의 선택지는 없습니다. 이 지위 외에 인간에게 좋으며 옳은 지위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로 돌이키는 것은 우리에게 손해가 나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좋은 많은 것을 주실 것입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하나님께 안기는 것은 인간의 의무(의무론)일 뿐만 아니라, 정말 좋은 것입니다(행복론). 문제는 우리는 본성적으로 이것을 내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행복을 제한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것을 꺼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품에 한번 안겨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3-2. 다만 조금 구체적으로 자세히 언급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돌이켜" 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을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좀 의아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는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검토되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내용에 이것이 포함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저 유신론자일뿐 그리스도인은 아닐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당신이 돌아가기로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받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매우 순결한 반면 우리는 매우 더럽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당신이 더러운 것은 당신의 죄 때문인데 이것을 청산하지 않는 한 하나님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청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외관상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도 완전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게 살거나 아니면 (매우 의아한 것인데) ① 여러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하기에는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②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며, ③ 예수님께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드리고, ④ 이렇게 하나님 앞에 무너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죄 없는 사람처럼 보아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서도 죽으신 것으로 쳐주신다고(간주) 합니다. 잘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고, 과연 이게 공정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고, 의아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자존심이 상하니까,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도 완벽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게 사는 방법을 택해야 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방법을 쓰려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완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딱 한 번만이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0.1초만이라도 먹었다면 당신은 이 방법을 쓸 수 없습니다. 탈락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한 번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채로 50년을 살다가 51년이 되는 해에 1분 동안 절도 행위를 했어도 우리는 형사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재미있게도 그 자체에서 이미 첫 번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성경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도 경험적으로 보아도, 우리는 모두 두 번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순결하시고 악을 극도로 혐오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주 작은 죄라도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실 마음도 없고 받으실 수도 없다고 합니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문제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온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세운 가치질서가 참된 것이고, 인간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에서만 행복할 수 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사는 것이 인간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막상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로 돌이키려고 하니, 우리가 더러워서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품위를 지키면서 우아하게 하나님께 돌아가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만물의 기준자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불결하고 역겹다는 것이니,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아보여도 우리 모두는 실제로 역겨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또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이 맨 처음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과 세계가 지어진 목적이, 하나님과 사랑의 교통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강간이나 살인도 매우 심각한 죄이지만, 가장 심각한 죄는 이 지위를 떠나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았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을 향해서 '너는 강간범이나 살인범보다 니가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니가 만든 선악에 되한 관점에 비춘 것이지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너도 똑같이 역겨울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맨 마음으로 그저 논리를 전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마음이 숙연해져 있습니다.
자 어쨌든 우리는 방법이 없습니다. 첫 번째 방법 즉 우리 힘으로 하나님 앞에 정당성을 주장하며 당당하고 품위 있게 서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비천한 모습으로, 예수님이 죽으신 효과를 나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구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원래 있어야할 자리로 돌아가려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3-3.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이것입니다. 기존의 삶을 그대로 둔채로, 기독교를 거기에 추가로 장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대충 믿거나 정도껏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인 내용만을 받아들이거나, 대체로 괜찮은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정도껏 믿고 있거나 기독교 밖에서 발에 물만 적셔보는 정도라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중 하나는 전 인격을 다 드림'입니다. 이것이 있으면 기독교인이고 아니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자기 인생에 2등이나 3등 가치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도 필요없다. 너의 인생을 나한테 다 줄 사람만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2등이나 3등으로서의 대우를 받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고 싶다면 나는 너희 인생에서 1등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너희는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나도 필요 없다. 죽은 후에 놀라지 마라. 겉보기에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것 같은 사람들이어도, 실제로는 내가 그들의 삶에 1등이 아니었던 자들을 지옥에서 많이 보게될 것이다. 나는 나를 따르는 자들의 삶 전체에서 최고이어야 하고, 1등이어야 하며, 전부이어야 한다. 나는 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그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인생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라. 나도 그런 사람은 필요 없다."
3-4. 대부분의 사랑은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주는 사랑과 필요에서 생겨난 사랑이다. …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주는 사랑이다.
…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의 사랑을 가지고 당신께 나아오라고 하신다. 신약성경에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다. 구약성경에서는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신다.
… 우리는 필요를 들고 충만한 분께 나아간다. 비천한 모습으로 최고 권력자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의로우신 분께, 도와주십사 부르짖으며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께 나아간다. 필요의 사랑, 이것이 우리의 가장 고상하고 건강하고 현실적인 영적 상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내세에서도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 필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죽을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사랑도 죽는다고 경고했다.
…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결핍을 진심으로 인정할 수 없다. 우선, 우리는 자신이 사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철저히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생각한다. 그게 안 되면 하나님이 우리의 겸손을 칭찬하실 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게 여의치 않으면, 우리가 겸손이 부족하다는 점을 명민하고 겸손하게 인정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내어 놓는다. 이런 과정은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의 본질적인 자유, 힘, 가치를 끝까지 붙들고 늘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 모두를 포기하고 '유쾌한 거지들'이 되어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자비는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받아야 할 사랑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랑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선한 자질들로 인해 사랑받고 싶어 한다. 우리가 애정, 우정, 에로스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비로 사랑받는다는 말을 듣는 것은 충격이고 상처가 된다. [Kathryn Lindskoog,『C. S. 루이스와 기독교 세계로』]
3-4. 이쯤 되면, 하나님이 다 옳다는 것은 알겠는데, 하나님 없이도 그냥 지금까지 살만했으니, 그러면 그냥 살던 대로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존심 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는 온 우주에 대한 사법권이 있다는 것이고, 그 사법권의 행사를 언제까지나 미루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성경이 또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래저래 성경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도 돌이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이렇게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기 까지 했고,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제발 제발 돌이키라고 했는데도 그것을 끝내 거절한다면, 그것을 중죄로 물으실 것이라고 또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돌이키는 것이라면 물론 좋겠지만, 이것이 두려워서라도 돌이켜야 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당신의 권위와 권세와 권력을 온 우주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행사하실 것이라는 부분만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저는 다 말한 것 같습니다. 돌이키십시오. 하나님은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왜 형벌을 받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싫습니까? 아니면 형벌을 받을 때 받더라도 그렇게 살고 싶을 만큼 엄청난 인생에 대한 계획이나 확신이 있는 것입니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사정합니다. 돌이키십시오. 원래 있어야 하는 그 자리로 돌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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