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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안된 생각들

성경에 관한 의문점들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21:06
[모아 두고 깊이 생각해 본 후 차차 정리하겠습니다. 사실 3번 의문점이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에 대한 주장, 판단, 결론은 난무하지만, 납득할만한(apologetical) 설명,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정리가 된다면 이 블로그에 있는 모든 글 중 가장 중요한 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들어 있는 이 모든 책만을 우리 믿음의 토대이자, 우리 믿음을 규정하고 확증해 주는 거룩한 정경으로서 인정한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의심 없이 믿는다. 그것은 교회가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① 성령께서 친히 우리 마음속에 그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할 뿐더러 ② 그러한 증언이 성경책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벨기에 신앙고백을 내가 번역함]

Ⅰ. 어떤 물건을 성경이라고 하나?
성경의 무오성을 이야기 할 때의 '성경'은 성경 원본을 말한다. 성경원본에는 오류가 없다고 보는 것이 성경 무오설의 주장이다. 필사본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가 읽어 볼 수 있는 것은 필사본 뿐이다.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필사본에는 얼마만큼의 오류가 있다고 볼 것인지가 논의의 핵심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논의는 이것을 빗겨나 수도 없이 변죽을 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Ⅱ. 성경이 맨 처음 기록된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음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1. 2세기 말까지는 지금의 성경 66권이 확정되지도 않았으며, 이 66권이 단일한 정경(canon, '규칙' 혹은 '표준'을 뜻하며, 공식적인 목록을 가리킨다)으로 취급되지도 않았다. 이런 시간상의 차이가 발생한 것은 어떤 책을 정경에 넣을 것인가에 대한 합의 도출이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따로 뜻을 모을 필요도 없었다. 어떤 책이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으로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광범한 동의가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급하게 그 목록을 형식화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단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이들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던 정경의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며 도전하기 시작하면서 형식화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주후 90년에 잠니아 회의(Council of Jamnia)에서 구약 정경이 확정되었으며, 신약 정경은 397년 카르타고 회의(Council of Carthage)에서 확정되었다. 하지만 분명 이전부터 구약과 신약 66권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의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 그래도 여전히 "맞아. 하지만 그건 내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성경 자체가 아니라, 정말로 성경이 있느냐 하는 거야"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즉 현재의 텍스트가 원본의 내용과 맞아 떨어지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이다. 성경은 수세기 동안 수천 번 필사된 고문서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텍스트가 최초 문서의 내용과 완전히 똑같을까? 실제로 성경 저자들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내용을 썼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문제에 대단 답은 간단하다. 어떤 고문서든, 그 완전성에 대한 판별은 현재 우리가 몇 개의 사본과 사본 일부를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사본으로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은 9-10개 밖에 되지 않으며 그나마 가장 오래된 사본도 그가 생존했던 시대 이후 900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카이사르가 실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전제나 갈리아 전기 내용의 완전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역사가는 없다.
플라톤 저작의 경우도, 고대 사본 중 현존하는 것이 10개 미만이며 이 중 가장 오래된 사본이 최초 저작 시기 이후 1,400년이 지난 후의 것이다. 그런데도 「갈리아 전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플라톤 저작의 역사성을 의심하거나 사본이 플라톤의 원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는 학자는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까? 신약 성경만 해도 헬라어 사본이 5천개 이상 남아 있고 따라서 이것으로 현재 성경의 정확성을 입증해 낼 수 있다. 초기 사본 중 다수가 원본 저작 시기와의 시간차가 25년에서 50년 정도에 불과하며, 900년과 1,400년이라는 긴 시간차를 가진 「갈리아 전기」나 플라톤 사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다. 마태복음 일부가 포함된 그 유명한 모들린 파피루스(Magdalen papyrus)가 그중 하나다. 구약 성경 사본의 증거 역시 차고 넘친다. 특히 1947년에 발견된 사해사본에는 그전에 나와 있던 히브리어 성경 사본들보다 천 년 더 빠른 문서가 들어 있을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구약 성경을 포함하고 있었다. 원문의 신뢰성을 기준으로 할 때, 그 어떤 고대 문서들 보다 성경의 신빙성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수의 역사성은 성경이 아닌 다른 역사 기록들도 증명하고 있다. 바로 1세기 그리스 작가 탈루스와 고대 로마의 행정관 플리니우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노티우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이다. … 그렇다면 성경에 나온 그 모든 기적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사건들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바닷물을 가르고, 빵 몇 조각과 생선 몇 마리로 수천 명의 사람들을 먹였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야기 등 성경은 초자연적 사건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이것 보세요. 그런 식으로 우주의 물리 법칙이 파괴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기적은 불가능하거든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다. 단, 신이 없다면 말이다. 기적과 관련된 성경의 서술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신의 존재나 초자연적 영역을 믿지 않는 이들뿐이다. 신 존재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순간 기적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 『성경은 믿을만 한가?』, pp.7 ~ 20]
Ⅲ.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다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 당시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는 대로 기록하였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실질적 진정성립의 문제)

Ⅳ.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셔서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경을 한점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진리를 기록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루이스는 성경을 오류 없는 권위라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관점이나 가톨릭의 관점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 어디에도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찾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즉, 루이스는 성경의 여러 사건을 검토한 후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 루이스는 성경의 모든 단락을 다른 것과 정확히 똑같은 의미로 오류가 없다고 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그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정확하기 때문에 구약의 군대 수가 통계적으로 정확하다고 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루이스는 현대인들이 때로 성경에 대해 주장하는 진리는 아마도 성경의 고대 저자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윌 바우스,『C. S. 루이스의 신학』, pp. 38 ~ 39]

Ⅴ. ①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고, ②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성경의 저자들이 기록하였고, ③ 그리고 그것이 현재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이 필사되어 전승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성경을 중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옳다고 판단하는 가치관에 맞추어 우리의 온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태도는 너무 이념헌신적이지 않은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성경 말고도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여겨지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사상에 따라 착하게 살면 되지 않는가? 성경 자체가 그렇게 정밀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릴 목적으로 쓰여졌는가?

[대답]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맥락을 잊지 않은 채 접근해야 납득이 됩니다. 성경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리기 위해 마련하신 책이므로, 그것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로서 주어진 것임을 전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실 정도로 희생적 사랑을 보여 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사랑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어떠해야 할지, 우리가 무엇을 귀중히 여기며 살아야 할지, 우리가 견지해야 할 세계관, 도덕 의식, 마음의 자세 등이 어때야 할지 자세히 알려 주시기 원합니다. 사실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성경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모두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딤후 3:16). 우리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최고의 충성을 바치기 원한다면 우리에게서 그 분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떻게 그 분의 뜻을 받들 수 있는지, 또 어떻게 그 분을 지속적으로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살피고, 세밀히 탐구하여 세부 사항에 있어서까지 자신의 신앙과 삶에 적용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강박 관념이나 외부로부터의 강요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아니면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을 받은 이로서 다시금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사랑하기 위해 취하는 방도입니다. [송인규]
↔ [의문] 그런데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는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이에 대한 대답이 기독교 신학의 사활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될 것 같다. 이것이 없으면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예배 중에 강해 설교를 할 필요도 없고, 그것을 들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신학자들은 신학 논쟁에서 성경 구절을 논거로 원용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대답] 디모데후서 3장 16 ~ 17절을 근거로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다음이 중요한데)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정리하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육체와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 성경을 통해 드러내셨다. 왜냐하면 디모데후서 3장 17절이 성경은 그것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로 쓰여 졌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 라고 믿기 때문이다.

↔ [의문] 그 구절이 그렇게 치명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만약 사람이 성경을 썼다면, 디모데후서 3장 16 ~ 17절의 내용을 책의 맨 앞 서문에 위치시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주된 목적이라면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번 반복해서 언급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하필 (비신자의 입장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게 구석에 박혀 있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 ~ 17절을 모든 기독교 신학의 논리적 기초로 삼는가? 그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기독교 신자들과 신학자들은 과도한 적극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버하는 것 아닌가?

↔ [대답] 타당한 의문이다. 기독교인들도 만약 예수님이 성경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지 않으셨더라면,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복음서의 예수님은, (적어도 인간의 관점에서는) 구약의 뜬금 없는 구절들을 수시로 인용하셔서 당신의 권위와 하나님의 가치질서를 설명하셨다. 때문에, 여기서 기독교인들은 통상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 편제상, 형식상의 위치와 관계 없이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성경 구절을 존중한다.

Ⅵ.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가장 높은 권위로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보수주의적 개신교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경 자체의 증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저자들에게 영감을 입혀 정확 무오한 내용을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우선, 구약이 그렇고 (딤후 3:16; 벧후 1:21 등), 신약 또한 사도들을 준비하여서 영감 입은 책을 쓰도록 했다고(요 14:26; 16:13; 고전 14:37; 살전 2:13; 벧후 3:15-16 등) 성경이 자체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송인규]
2. 루이스는 하나님이 성경 외에 다른 방식으로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 그는 하나님이 성경, 교회, 그리스도인 친구들, 다른 책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데도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한다. [윌 바우스『C. S. 루이스의 신학』, pp.44 ~ 45]
3. 우리는 교회의 증거에 의하여 감동과 권유를 받아 성경을 아주 고상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데까지 이를 수가 있다(딤전3:15). 그리고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의 신령함, 교훈의 효험, 문체의 웅장함, 모든 부분의 내용상의 일치성, 내용 전체의 목표(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을 밝혀 주는 충분한 내용 전개, 이 외에도 많은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점들 그리고 성경의 전체적인 완전성 등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입증해 주는 논증들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무오한 진리요,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말씀에 의하여 말씀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에 의해서이다(요일2:20,27, 요16:13-14, 고전2:10-12, 사59:2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4. 성경은 독특한 권위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경이 다른 동등한 것들 중에서 제1의 것(primus inter pares)이 아니라 오직 하나뿐인 제1의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동등한 것들 중에서 첫 번째 것이라면, 어떤 면에서 다른 것들과 동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과 동등한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만이 그 원천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 우리는 이 책들 속에 들어 있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믿으며, 그 권위를 인간이 아닌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얻는다. …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고대의 것이든, 어떤 관습이든, 숫자든, 인간의 지혜든, 판단이든, 선언이든, 칙령이든, 교령이든, 종교회의든, 환상이든, 이적이든 어떤 권위든, 성경말씀과 비교 대조해 보아야 하며, 이 성경에 따라 모든 것을 조사, 통제, 교정해야 한다. … 게다가 성경을 우리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유일한 권위요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는 오직 믿음(따라서 구원 교리)에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으로도 이어졌으며 믿음에 대한 유일한 권위 있는 근거로도 이어졌다. … 신앙고백서와 신조들, 교회 교부들의 글들, 교회와 교회의 공적 사역이 성경 아래에 있을 때, 제2차적인 원천으로서 이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원천들 속에서 말씀 자체의 권위를 가지고 분투한 진솔하고 잘 훈련된 심련과 지성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종속적인 원천이긴 하나, 그들이 기여한 것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곧 현대 교만의 극치요, 우리는 만고의 지혜로부터 자립함으로써 결국 우매한 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존 암스트롱,『솔라 스크립투라』, pp.119 ~ 139]

Ⅶ. 성경과 교리의 관계 
1.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곧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성경은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진리, 교리)과 우리의 생활을 분리시킬 수 없음을 가르친다.” [로이드 존스]
2.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루이스는 불완전함을 전혀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조직적인 형태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의 조직으로 축약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시편 사색』에서 루이스는 "조직은 계시의 빛을 따라갈 수 없다. 인간의 온 마음만큼 넓고 사랑의 그물만큼 섬세한 망만이 신성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 루이스는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은 그리스도이지 성경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 루이스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였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성경이 '이 말씀'을 입증하는 신뢰할 만한 증거라는 것으로 충분했다. 루이스는 조직 신학이나 성경의 일관된 교리를 세오는 것을 결코 본질적인 문제로 보지 않았다. … 루이스에게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마음을 확짝 열어 '신성한 물고기'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윌 바우스,『C. S. 루이스의 신학』, pp.39, 40, 43, 45]
3. 루이스는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 채택된 문학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학으로 변형될 수 없지만 문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그릇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윌 바우스,『C. S. 루이스의 신학』, p.38]

Ⅷ. 성경과 교회의 관계
1. 루이스에게 성경은 교회보다도 높은 권위를 갖고 있다. 1961년 12월 28일에 쓴 편지에서, 루이스는 교회가 우리에게 성경을 주었으므로 성경은 교회를 비난할 근거를 줄 수 없다는 논리에 대해 이야기 한다. A의 권위 위에서 B를 받아들이면서도 B를 A보다 더 높은 권위로 간주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루이스는 자기가 한 한생에게 어떤 책을 추천한 것을 예로 든다. 학생은 루이스를 통해 그 책을 접했지만 그 책의 저자가 우리스보다 책의 주제를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윌 바우스,『C. S. 루이스의 신학』, p44]

Ⅸ. 정말로 하나님께서도 지금의 교회가 하고 있는 것처럼, 적극적으로 해석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기록하여 주시고 지금까지 보존하여 주신 것인가? 문맥과 단어의 사용 그 심층적 의미를 파해쳐 알라는 목적으로 성경을 남겨주신 것인가? ① 성경에 반하지 않는 방식으로만 믿음의 내용을 구축해 나가면 충분한 것 아닌가(소극적 용도로만 사용하면 충분한 것아닌가)? ② 성경의 적극적 기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믿음의 내용의 적극적 내용 중 성경이 차지해야 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전부인가? 아니면 일부인가? 일부라면 어느 정도 인가?

1. 일반은총으로 충분했더라면, 계시와 환상을 주시더라도 기록하시고 또 보존하시기 까지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게다가 업데이트의 필요성이 있었다면, 그러셨을 것이다. 당시에만 필요했다면, 선지자를 통해 특별계시를 주셨다가, 지금껏 굳이 보존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존하셨는가? 그렇다고 볼수 밖에 없다. 보존정도와 그 역사가 너무 기이하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선지자들에게 전해주신 계시 중 어떤 것들은 지금까지 보존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경 자체가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껏 보존해 주신 계시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Ⅹ. 성경이 권위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성경의 권위란, 성경이 참된 인간으로서의 생활과 믿음의 기준이 되는 성질을 말한다. 이 말의 이면에는 성경을 따르지 않은 삶은 틀린 삶이라는,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는 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주장이 전제되어 있기도 하다. 이 글은 성경이 이러한 권위를 갖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왜 하필 성경인가?'하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성경이 권위를 갖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경이 권위를 갖는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적 행동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래 수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고 또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으나, 그 수많은 계시들 중 현재의 66권만이 기록되고 또 보존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성경을 권위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전제로 할 때에만 말이 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부터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사본은 어떡하냐?' 하는 문제와 '그렇지만 결국은, 성경이 무엇인지를 사람이 확정한 것 아니냐?'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예상되는 반론들이 있기는 한데,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한다.
쉬운 얘기를 어렵게 표현하자면, 이러한 섭리적 행동에 묻어 있는 의도(意圖)와 의지(意志)가 성경을 권위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수 많은 특별 계시들 즉, 음성, 기적, 이사, 현현 등으로 당신을 나타내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 중 일부를 선별하여서, 기록되고 보존되고 또 책으로 엮이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그 책을 통해 특별히 더 나타내기로 작정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당신이 판단하는 참된 가치 질서는 무엇인지 그 책을 통해 드러내기로 작정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당신의 백성이 그 책을 통해 당신을 알 수 있도록 특별히 그 책을 보존하고 전파되도록 주관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① 21세기, (앞으로 존재하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22세기, 23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타당한(valid) 것들 중 ② 다시 후세에 전달되기 원하시는 것들을 이 책으로 남겨 두셨다. 이 때문에 성경의 현대적 적용이 타당성을 갖게 된다. 독일식으로 추상화하여 표현하자면, 성경의 권위는 경험적 사실에 기반하여 형성되고, 일단 이렇게 한 번 형성된 권위는 거꾸로 경험적 사실의 해석을 통제하게 된다.
이것을 정리해 두는 이유는, 성경이 권위를 갖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려는 책들은 많았지만 비신자들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설명을 내어 놓는 경우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왜 그렇게 성경을 살피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하나님이 이 책을 이렇게 보존해 주신 데서부터 '강력하게' 추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때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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