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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안된 생각들

하나님의 뜻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20:00

"섭리에 대한 무지가 모든 것들 가운데 최고의 비참함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최상의 복이다."[존 칼빈]


1. 하나님의 '뜻'에는 크게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 ① 하나는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기뻐하시는 가치관이다. 이것은 성경을 탐구함으로써 알 수 있게 된다. ②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지고 계시는 반드시 일어날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 ③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이, 각자의 구체적인 삶에서 그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진력하기를 원하시는 각 개인의 목표를 말한다. ④ 또 다른 하나는 각 개인을 현재의 상황과 환경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말한다. ⑤ 또 다른 하나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해야 타개할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말한다.
②와 ③은 묶어서 논의되기도 하는데, 나는 이 둘을 준별(峻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오늘날은 정말 많은 신자들이"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이 때의"하나님의 뜻"은 대게 ②, ③, ④의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뜻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들 중에서도 ③과 ④의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하다.

2-1.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다룰 때는 '창조주의 관점까지 포괄하는 전체적 관점'과 '피조계 내적 관적'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다.

3. 오늘날 신자들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각 개인의 삶은 여러 선택지를 가진 선택의 연속이 되었다. 정확하게는, 각 개인은 매순간 뭐라도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따라 삶의 국면이 다양하게 바뀌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이제는 생존을 위한 1차적인 물질상의 필요로 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신자들은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투입할 수 있는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보유하게 되었다.

3-1. 20대에 자신의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여 번민하고 고민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나도록, 그리고 우리가 성숙해지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4. 신자들이 ②를 알기 원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ⅰ) 하나는 ②를 알게 될 경우 하나님의 전체 계획 중에 현재 자신의 인생이 어디쯤에 있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이 점에서 ④와 관련이 있다)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ⅱ) 다른 하나는 자신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이유 때문에 ②를 알고자 하는 것을 두고 자기사랑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ⅲ)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이유는, 자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4-1.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결국 성취되는 것은 여호와의 뜻이다. [바른성경 잠언 19장 21절]4-2. 여호와시여,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며, 그의 걸음을 정하는 것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함을 내가 압니다. [바른성경 예레미야 10장 23절]

4-3. 여호와께서 사람의 발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즐거워하신다. [바른성경 시편 37편 23절]
4-4. 네 길을 여호와께 맡겨라. 그분을 신뢰하면 그분이 이루실 것이다. [바른성경 시편 37편 5절]
4-5.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은 영원하여 거기에 보탤 수도 없고 뺄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시려는 것임을 내가 알았다. [바른성경 전도서 3장 14절]
4-6.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바른성경 마태복음 10장 29절]
4-7.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중하다. [바른성경 누가복음 12장 7절]
4-8. 그렇습니다. 아버지시여, 이것이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른성경 누가복음 10장 21절]
4-9. 이처럼 너희가 아주 작은 것도 할 수 없으면서 왜 다른 것들에 대해 걱정하느냐? [바른성경 누가복음 12장 26절]

5. 한편 ③을 알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를 따라 불꽃처럼 충성하는 삶을 살기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실패하게 하시기로 계획하셨는지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이것은 학교 선택, 직장 선택,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의 문제를 포함한다.
  ③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도 몇 가지가 있다. ⅰ) 첫째는 신자들에게는 각자의 삶의 무대가 있는데, 그 무대에 애착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려 할 때마다, 그러한 열심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우리의 마음에 수시로 찾아오기 때문에 무엇 하나 열심을 내어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일을 열심히 잘하게 되면 그 일에서 성공하게 마련인데, 우리의 마음은 쉽사리 그 성공을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설사 일을 제대로 잘하게 되는 때에도 그 동기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는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마냥 뜨뜻미지근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는 없다.
  ⅱ) 둘째는, 우리는 현재 걷고 있는 길에서 이탈하여 다른 길을 걸을 수도 있게 하는 선택지를 계속해서 제공받기 때문이다.
  ⅲ) 셋째는, ③을 알 경우, 죄를 지어 하나님과의 단절을 맛보거나 침체에 빠졌을 때 자신이 열심을 내어 하던 일에서 이탈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③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뜨려지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감당하고 있던 일을 열심히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이 우리 마음 안에서 '너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최우선 순위인거 몰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도 안 됐는데, 너 지금 일을 열심히 해도 된다고 생각해? 니가 보여준 그 동안의 열심은 사실 자기사랑에서 비롯된 열심이었구나?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하지 않고 너 지금 이 일은 해서 뭐할래? 너 악인의 형통은 죄인거 몰라(잠 21:4)?'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반면에 ③의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을 경우에는 최소한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옳은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하고 있던 일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다.

5-1. 섭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전능성에 전적으로 맡기고 그들의 부르심에 성실하도록 해준다. …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소명에 대한 의무를 부지런히 수행했다. 더욱이 그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걱정을 주님께 맡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12). [존 칼빈, 『기독교 강요1』, 기독교문사 刊, p.428]

5-2."사악한 자들의 쟁기질은 죄다"(잠 21:4).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쟁기질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가? 틀렸다. 나태함도 마찬가지로 죄악이기 때문이다. [아더 W. 핑크, 『인간의 전적부패』]

5-3. 요한 웨슬리는 당시 모라비안들의 습관에 따라 지팡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갈등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지팡이를 땅에다 세워 놓고 소피와의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면 자기 쪽으로 쓰러지고 아니면 반대편으로 쓰러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지팡이는 웨슬리의 반대편으로 쓰러졌다. 이것은 아주 미신적인 면이 있지만 그만큼 웨슬리가 얼마나 답답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마침내 그는 심한 내적 갈등을 뒤로하고 소피와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후 소피에게 결혼한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김학중, 『존 웨슬리』, p.66]

5-4. 모든 장군들과 … 모든 백성이 나아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말했다."부디 우리의 간청을 들으시고, 우리와 이 모든 남은 자를 위하여 여호와 당신의 하나님께 기도하여 주십시오. … 여호와 당신의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야할 길과 해야 할 일을 말씀해 주시기 원합니다."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말하기를"내가 너희 말을 들었으니, 보아라,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너희 말대로 기도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시는 모든 말씀을 너희에게 알려 주고, 너희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아니할 것이다."하니 [바른성경 예레미야 42장 1~4절]

5-5. … 얼마 후에 잉햄 역시 식민지 생활을 견딜 수 없어서 귀국하자, 존 웨슬리는 두 번째 원조의 편지를 휘트필드에게 보냈다. 더머에서 그 편지를 받은 휘트필드는"그것을 읽을 때 내 가슴이 뛰었고, 말하자면, 소명이 메아리쳐 울렸다"고 말했다. 편지를 읽고 난 후 휘트필드는 존 웨슬리의 요구를 신중하게 고려했다. 그리고 여러 친구에게도 의견을 물으면서"하나님의 섭리가 어디에 있는지"기다렸다.
휘트필드는 이처럼 조지아행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신중히 고려하면서 선교사로의 결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는 선교적 결단으로 조지아에 갈 것을 결심했다. [송삼용, 『조지 휘트필드』, pp.70~71]

5-6.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자. 먼저 하나님의 입장에서의 일들을 생각해보자. 이에 대해 ②의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뜻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고려 요소들을 알고 계시고 그 모든 것들을 가장 공정하게 판단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③의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뜻이 존재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입장에서 고려해야 보자. 부정적인 배우자감(예컨대, 입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 방탕한 사람 등등)을 배척하는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부정적인 배우자감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걸러지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③을 ⅰ) 탐구하거나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로 구하여서 ⅱ) 그것을 알아내서 ⅲ) 그것을 행할 것을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가 하는 점이다. ③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기도로 구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도로 구해야 할 것은 이 가운데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뜻을 따라 나의 감정과 판단을 인도해 주시기를이다. 내 마음이 기뻐하고, 또한 배우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으며, 부정적인 요건을 갖추지 않은 사람을 선택하면 된다. (로이드 존스는 이런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으면 일단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것은 참고할만한 지혜이다.)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께서 막아주시기를 구하면 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부관계의 한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 된다.
다만 이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연애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항상 연애는, 자신의 사회적 · 경제적 독립능력이 갖추어 졌을 때, 결혼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한다.

5-6-1. 그 종이 주인의 낙타들 중에 열 마리를 이끌고 떠났으니, 그 종은 주인의 온갖 좋은 것을 가지고 메소포타미아를 향해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렀다. 그가 말했다."여호와, 제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여. 오늘 저를 형통하게 하셔서, 제 주인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소서. 보소서, 제가 여기 샘물 곁에 서 있겠습니다. 그때 저 성읍 사람들의 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오면, 제가 어떤 소녀에게 '당신의 물동이를 기울여 내가 마시게 하시오.' 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때 그 소녀가 말하기를 '마시십시오. 당신의 낙타들에게도 내가 물을 마시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 소녀가 주께서 주님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사람이며, 그 일로써 제가 주께서 저의 주인에게 인애 베푸신 줄 알겠습니다. 보아라, 그 종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인 밀가의 아들 브두엘에게서 태어난 리브가가 어깨에 물동이를 메고 나왔는데, 그 소녀는 외모가 매우 아름다우며,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였다. 그 소녀가 샘으로 내려가서 그의 물동이를 채워 가지고 올라오는데, 종이 그를 만나려고 달려가 말하기를"당신 물동이의 물을 내가 조금만 마시게 하시오."라고 하니, 그소녀가 말하기를"내 주여, 마시십시오."하고 재빠르게 물동이를 그의 손에 내려 그로 마시게 하였다. 그가 다 마신 후 소녀가 말하기를"주의 낙타들이 다 마실 때까지 제가 그들을 위해서도 물을 긷겠습니다."하고, 재빠르게 그의 물동이의 물을 물통에 붓고, 다시 물을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 모든 낙타들을 위하여 물을 길었다. [바른성경 창세기 24장 10절 ~ 20절]

5-7. 개인적으로 이 의미의 하나님의 뜻과 관련해서 씨름을 많이 했다. 나의 경우는 특히 여기에 겹쳐서 내가 거듭나지 않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였을 때가 있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장기간 침묵하셨고 나는 3중의 어려움 가운데 있었다. 그 때는 여러가 지 생각을 하였다. ⅰ) 첫째로, 내가 가는 길에서 실패하는 것이 나의 (이런 번민으로 인한) 나태함 때문이라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는 것인가? 일의 성패가 나의 열심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일의 성패에 전전긍긍하며 살게 될 것이다. ⅱ) 둘째로, 악인은 그 쟁기질도 악하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나태함 가운데 계속 실패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모든 일을 멈추어야 하는가? 모두 멈추고 믿음으로 생명을 걸고 응답해주시기를 구해야 하는가? 그렇게 할 만한 믿음도 없고 건강도 없다면 어떡해야 하는가? 나는 정말 생기 넘치게 내가 가는 길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인받은 채로 열심히 살고 싶은데, 나는 왜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살아야만 하는가? ⅲ) 셋째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 수 있단 말인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으며, 어떻게 열심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는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문제와 하나님의 뜻을 명료하게 아는 것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모두 해결되기 전까지는 어정쩡한 태도로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단기간에 해결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분명한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 상태에서도, 내가 나의 행동원리로 삼을수 있는 분명하고 확실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로부터 확실하게 도출해 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질 때까지는, 그래도 지금의 상태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들에 기초해서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 분명하고 확실한 것들을 따라서, 선이 굵게 행동해야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너는 강하고 대장부가 되어라"(열왕기상 2장 2절).

5-8.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원칙적으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학교, 직장, 사역지)이 있는 경우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경우가 다르다. 전자의 경우,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곧바로 논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그 외의 일들이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보다 높다는 것만큼은 적절하게 추론해 낼 수 있다. 
다음으로, 지금하고 있는 그 일에 성실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반한다는 것은 (단순한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확실하고 분명하게 추론할 수 있는 원리이다. 그렇다면 지금하고 있는 일에 적극적으로 충성하는 것과 나태하게 그 일을 수행하는 것 사이에 중간 형태가 있는가? 있다. 최선을 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태하다고 비난할 수 없는 정도로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중간지대에 거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없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에는 나태, 최선의 충성, 중간지대가 존재하는데, 나태와 중간지대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당신이 처해 있는 환경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그 가운데서 당신이 기쁜 마음으로 생동감 넘치게 그리고 창의적이고 열정적으로 그 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렇다면 또 다시 당신은 시간상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적극적으로 이 일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하신 시간의 한계선이 다가오면, 그 전능하신 능력을 따라 당신의 인생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이렇게 하더라도, 하나님이 뜻하시는 한계선을 넘어서까지 하나님을 거스르려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여기시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그러므로 당신은 적극적으로 단기의 계획과 장기의 계획을 가지고 당신의 일을 사랑하여야 한다. 오히려 할 수 있다면 더 창의적이고 더 적극적으로 당신의 일을 사랑하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당신의 일을 기뻐하라!","당신의 직장을 기뻐하라!","당신의 사역지를 기뻐하라!","당신의 학교를 기뻐하라!","당신의 전공을 기뻐하라!"

5-8-1. 범사에(!!)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라. 수정되어야 할 부분은 자기사랑의 동기이지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부분이 아니다. 축복은 축복대로 구하되, 자기사랑의 동기를 하나님 사랑의 동기로 바꾸어 주시기를 구하라.

5-9.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호하게 느껴질 때, (이것을 귀류법이라고 불러도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반대 가정(假定)을 해보는 것은 종종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

5-10. 자신이 도모하던 일들이 반복해서 실패하게 될 경우, '내가 열심을 내지 않으면 내가 도모하는 일이 실패하게 되는 것인가? 역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든다. 이 경우 그렇다면 하나님이 도우시든 말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기로 다짐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 한다. 불안, 염려, 근심,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영적 침체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영혼의 회복이 있기 전까지 무기력하게 사는 것이다. 절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나중에 영혼이 회복되었을 때, 후회하게 된다. 영혼이 회복 되었을 때, 그 시간을 낭비한 것과, 그 시간을 지금을 위해 더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5-10-1. 이것들을 이기는 중요한 한 가지 방법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이것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저것은 저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는 자신의 정욕적인 아집을 버리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고 언제나 말씀으로 나늘 건지신다는 것을 굳게 붙들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면 나는 충분하다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고쳐야 한다. [김남준]

5-10-2. 우리를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선제권을 가지고 계신가 아니면 우리가 선제권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때를 따라서 공급하시는가? 아니면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누려 우리의 필요는 채우는 것인가? 분명히 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알아서 공급하신다. 우리가 구할 것은 '아버지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나의 생각과 마음을 붙드시며 나를 보호하시고 나와 함께하소서'이다. 아버지께서 인도하신다.

5-11. 우리는 날마다 생각을 빼놓고 그저 성실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을 선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일반은총의 질서 아래에 두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일이 반드시 성취되도록 전체적인 계획 하에 일을 도모해야 한다. 이것은 일반은총에 속하는 지혜의 문제이다. 이러한 도모는 대부분의 경우 교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만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으로 이러한 도모가 항상 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과, 지혜롭고 책임감 있는 일의 도모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이 양립하는 지점을 찾아내어서 그것을 자신의 생활 태도로 삼아야 한다.

6. ④의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형통할 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복주심인지 방임인지를 잘 파악해야하고, 불통할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인지 연단인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④를 아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게 한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마음을 찢어야 할지를 올바로 판단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6-1. 사실상 우리는 육신적인 상식에 따라 매사가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운명적으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도 그에게 예배드리려고 하지 않고 징계를 받고도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다. 똑같은 이유로 예레미야나 아모스는 유대인들을 호되게 책망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선한 일과 악한 일이 모두 하나님의 명령 없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애 3:38, 암 3:6). [존 칼빈, 『기독교 강요1』, 기독교문사 刊, p.426]

6-2. 하나님께서는 인내와 온유를 위해 경건한 자녀들을 연단시키신다."주님께서 뜻하신 것이니 반드시 견뎌야만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것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정당하고 유익한 것(iustum et expediat)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계획하시지 않기 때문이다."[존 칼빈, 『기독교 강요1』, 기독교문사 刊, p.425]

6-3.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의도만을 가지고 일을 행하시지 않는다. 한 사람에게 발생한 사건은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예컨대, 사도행전 12장 19절을 보라). 언제나 그렇다.

6-4. ④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우리는 근심하게 된다. 반대로 ④를 아는 지식이 희미하게나마 추가될 때 우리는 끼뻐하게 된다.

6-5. ④를 온전히 아는 것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④를 아는 지식이 필수적이다. 이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 ④가 조금이라도 있어야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예컨대 친자(親子)관계에 있어서도, 부모가 왜 때리는 지를 모르는 상태로 맞는 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6-6. 에드워즈가 24년간 일했던 교회에서 해임될 당시 그의 나이는 당시 평균 수명을 조금 넘긴 마흔여섯 살이었다. 당시 에드워즈의 자녀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나는 오랜 기간 목회에 전념해 왔고 이 나이에 다른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드네. … 지금 나는 내 자신을 벼랑 위에서 내던지는 기분이네."…당시 목회자들에게는 한 회중을 떠나는 것도 어려웠지만 새로운 목회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자리가 빈 목회지를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웄을 뿐만 아니라, 황야를 가로질러 무거운 짐을 지고 가족들이 이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심리적으로도 마음을 고갈시킬 만한 일이었다. … 에드워즈 가족은 인디언들과 섞여 살기로 결정했다. … 인디언 소년들이 사용하던 학교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타 버렸다. 많은 학생들이 실망해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에드워즈는 학교 건물의 재건을 위해 전력해야 했다. … 대부분의 윌리엄 가 사람들은 인디언들의 땅을 사기적인 방식으로 빼앗거나 선교를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일들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윌리엄 가와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그 일은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이른바 프렌체-인디언 전쟁(7년 전쟁)이라 불리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 그해 여름부터 에드워즈의 집에는 군인들이 기거했다. 마침내 1754년 9월, 마을 전체가 인디언들에게 공격당하는 급습 사건이 발생했다. … 인디언들과 적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할 즈음 에드워즈는 병들어 앓아눕게 되었다. 장기간 마음 고생으로 감정적 상처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에드워즈에게 당시 발명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1754년 7월에는 그가 표현한 대로"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든 질병"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 그러나 이 병으로부터 회복되자마자 말을 타고 여행하던 에드워즈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1755년 4월 가족을 방문하기 위해 윈저로 달리던 중 말의 앞발이 돌에 걸려 그대로 앞으로 거꾸러졌는데, 말도 앞으로 넘어지면서 에드워즈의 몸이 말의 몸 밑에 깔리는 사고가 난 것이다. …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왜 이렇게 많은 고난을 주시는지에 대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글러스 스위니,『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씀사역』, pp.187 ~ 204]

6-7. 고난이 지속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흔들린다. 이것은 많이 힘들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흔들어서 그것을 교정하고 더 확장하고 더 심화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바르고 더 풍성하고 더 깊이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을 흔드신다.

6-8. 경건한 신자도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다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형통을 주신 경우라 해서, 그것이 언제나 하니님의 기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무게를 두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성공과 번영이 반드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증거는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갖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기 원하시는 구나'하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뭔가를 잘못 했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또 화를 내시는 구나'라고까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형통 · 불통과 하나님의 희노(喜怒) 사이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중대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6-8-1.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이것과 저것을 병행하게 하셔서, 사람이 그의 장래에 일어날 일들을 알 수 없게 하셨기 때문이다. [바른성경 전도서 7장 14절]
6-8-2.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보니, 푸른 나무같이 번성하나 [바른성경 시편 37편 35절]
6-8-3. 보아라, 이들은 악한 자들이나 항상 평안하며 재산이 늘어난다. [바른성경 시편 73편 12절]
6-8-4. 내가 어떻게 이 일을 이해해야 하는가 생각할 때 그것이 내게 힘들었으나 [바른성경 시편 73편 16절]

7. ④를 아는 것과 관련해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신자가 자신의 삶과 인생이 하나님의 선하신 장중(掌中)에 있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는 경우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없다고 믿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해 그렇게 많이 신경 쓰시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문제다. 하나님은 온 우주(universe)를 다스리시고 이 세계의 정치, 경제, 군사 문제나 특별한 악인과 특별한 의인을 주관하시는 데는 많은 관심과 각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만, 자신의 삶과 인생을 주관하시는 것은 이들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가운데 부수적으로 처리하시는 업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자신의 삶과 인생을 인도하시는 것은 아프리카의 들소 떼 중 한마리에 대한 다스리심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7-1. 그러므로 … 우리는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를 말하는 자들, 즉 하나님은 각 피조물들을 특별히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견해를 정당하게 반박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보잘것없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마 10:29)고 선언하셨을 때 즉시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즉 우리는 참새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세밀하게 보살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마 10:31).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우리의 머리털가지 다 세신 바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그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라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존 칼빈, 『기독교 강요1』, 기독교문사 刊, p.422]

7-2. 하나님의 섭리의 빛(lux divinae providentiae)이 일단 경건한 자에게 비췰 때 그는 이전에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극단적인 불안과 두려움뿐만 아니라 모든 염려에서부터 구출되어 자유함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당연히 운명을 두려워한 것처럼 이제는 두려움 없이 자신을 하니님께 맡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경건한 자는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만물을 그의 권능으로 붙드시며 그의 권세와 뜻에 의해 다스리시며 그의 지혜로 통치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nihil, nisi ex eius destiatione, cadat)을 알게 될 때 위로를 받을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천사들로 하여금 돌보시게 하셨다는 것(angelorum curae demandatum)과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나 불, 쇠가 결코 자신에게 해를 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1』, 기독교문사 刊, p.430]

7-3. 사람이 겪는 고난 중에는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이다(신 29:29). 자신이 마치 해결 방법을 아는 듯이 조언하는 것은 영적 교만의 소치다. [신원하,『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p.45]

7-4. 브루스 웨어는 자신의 책 『더 큰 하나님의 영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고난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지만, (전부가 아니라) 대부분은 선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도록 정해져 있다. 고난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으로서,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① 고난은 때때로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는 의도적이고 공인된 수단이다(예컨대 민 16:31~35, 41~50; 사 10:5~19). 많은 경우에 이 신적 심판은 심판을 당하는 사람들의 결과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이끄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 ② 하나님은 고통과 고난을 자기를 따르는 데 완고한 태도를 보이는 자녀들을 교정시키는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예컨대 잠 3:12; 12:9~11).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신자의 삶 속에 고난이 주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죄 때문이라는 관념이 크게 무시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했다. ③ 고난은 신자들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강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도구일 수 있다(예컨대 롬 5:3~5; 약 1:2~4).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이미 신실한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믿음을 더 강화시키기 위해, 또 이미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더 깊이 의지하게 하려고 그리고 우리가 즐거움과 형통함과 상대적으로 평안한 삶을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해 온 것처럼 큰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할 수 있게 하려고 고통과 수고와 고난을 계획하신다. ④ 고난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월등한 권능과 영광을 더 분명히 깨닫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예컨대 고후 4:8~12; 12:8~10). ⑤ 고난은 신자들에게 고통과 고난 속에서 있는 다른 사람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구비시키는 도구로 주어질 수 있다(예컨대 고후 1:3~7). 다년간 다는 기본적으로 아주 유사한 간증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인생에서 아주 가혹한 시기를 거쳤고, 그 시기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상황 속에서 나는 극도의 고통과 고뇌에 시달리고 압도당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은 내 인생 속에 나와 유사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많이 보내주셨고,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강화시키는 데 나의 고난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나의 과거 경험을 사용하셨다."⑥ 고난은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우리의 충성을 증명하고 시험하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기 위해 고난과 함께 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도의 필수적이고 당연한 한 부분이다(예컨대 요 15:18~20; 빌 3:10; 딤후 3:12). 만일 우리가 잘못되고 우상 숭배적인 악력(握力)으로 이 세상을 쥐고 있다면, 얼른 놓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고난으로 인해 가질 수 있는 고통과 고뇌가 두렵다면, 고난 너머로"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로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예수님을 바라보자(히 12:2).

8. ⑤의 의미를 가진 하나님의 뜻과 관련해서는, 옛날 이스라엘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서 물으려 할 때에는"선견자에게 가자."라고 하였으니 [바른성경 사무엘상 9장 9절]

8-1. 사무엘상 23장 9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보전책을 위해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위대한 보호자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방향을 문의 하였다. 에봇이 그에게 오자마자 그는 곧 그것을 사용하였다."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고 하였다. 우리의 손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이 들려져 있다. 우리도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자."성경을 이리로 가져오라"고 말하자. [매튜 헨리 성경 주석 - 사무엘상 23장 9절]

9.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이방의 빛"으로 삼으신 것을 알고 있었고(행 9:15~16, 13:47, 20:24, 22:10,21, 23:11, 26:16~18), 베드로 역시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자신의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자신을 택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행 15:7). 디모데는 '전에 자신을 지도한 예언'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분부 받았다(딤전 1:18). 또한 구약의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디로 인도 하실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매일 걷는 (문자 그대로의) 그 걸음이 지금 현재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들을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보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9-1.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길을 가는 동안에 구름시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앞으로 나아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이스라엘 온 종족이 그 모든 길을 가는 동안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구름 가운데 있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바른성경 출애굽기 40장 36절 ~ 38절]
9."우리의 평안과 만족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를 아는 것에 좌우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확신이 없을 경우 우리는 두려움에 떨게 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폴 리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p.3]

10. 이상의 내용들과 관련해서 우리가 탐구해 보아야할 내용은 ⅰ)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이 합당한가, ⅱ) 하나님이 우리에게 (②와 ③의 의미를 가진)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는가, ⅲ) 알려주신다면 어떻게 알려주시는가이다.

10-1. 비록 아버지다운 자비하심과 사랑(paternus Dei favor et beneficentia), 혹은 심판의 엄격함(iudicii serveritas)이 종종 섭리의 전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사건의 원인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가 운명의 맹목적인 충동(fortunae impetu)에 의해 소용돌이친다는 사상이 슬그머니 끼어들게 되며 또한 하나님이 마치 인간을 공처럼 이리저리 내던지면서 장난을 치시는 것처럼 육신적인 반발심(obloquendum care)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실로 우리가 조용하고 침착한 마음을 가지고 배울 준비(discendum parati)를 갖추고 있으면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을 세우시는데 있어서 최상의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최상의 이유라는 것은 그 자신의 백성을 참을성 있게 가르치시는 것, 그들의 악한 감정을 교정시키시고 그들의 정욕(lasciviam)을 억제하시는 것, 자신을 부인하게 하시는 것, 그들을 나태함으로부터 일깨우시는 것, 혹은 또다시 교민한 자를 낮추시는 것 … 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원인들이 우리의 시각에서 숨겨져 있고(abnegation)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틀림없이 하나님 안에 놓여 있다고 믿어야만 할 것이다.
  … 우리는 겸손한 마음(tenenda modestia)을 지님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해명해 달라는 식의 요구를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모든 일의 가장 정당한 원인(rerum omnium causa)으로 여겨야만 한다. 하늘이 짙은 구름으로 어두워지고 격렬한 폭풍이 일어날 때에는 음침한 안개가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천둥이 우리의 귀를 때리며 우리의 모든 감각이 공포로 인해 마비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혼란스럽게 뒤엉켜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동안에도 하늘에는 언제나 평온함과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혼란한 일들(res in mundo turbulentae)이 우리에게서 판단력을 빼앗을 때에 하나님은 그의 공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이러한 활동들을 가장 질서정연하게 조절하고 통제하셔서 올바른 목적으로(in rectum finem) 인도하신다고 추론해야만 할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1』, 기독교문사 刊, pp.410 ~ 411]

10-2."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으뇨"(롬 11:33-34, 시 40:13-14 참조).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욥 26:14).

10-3. 여호와 께서 말씀하신다."화 있을 것이다. 반역하는 자식들아, 너희가 계획을 시행하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 조약을 맺을 때에도 내 영으로 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죄에 죄를 더할 뿐이니, 그들이 내 입에 묻지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 바로의 보호아래 피난처를 찾으려 하며, 이집트의 그늘에 피하려 한다. [바른성경 이사야 30장 1~2절]

10-4. 사람이 겪는 고난 중에는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관이다(신 29:29). 자신이 마치 해결 방법을 아는 듯이 조언하는 것은 영적 교만의 소치다. [신원하,『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p.45]

11.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 : ⅰ) 우리가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는 어떨지, ⅱ) 견인교리(시 73:24), ⅲ) 그리스도인의 대치할 수 없는 목표는 복음 전파와 이웃구제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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