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부의 분배에 관하여 본문
1. 사회 구성원 중 누군가는 하층민이 되어야 한다. 이 점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하층민이 된 것이 부모의 재산 때문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그 누군가가 부자로서 살게 된 것이 그의 부모가 가진 재산 때문이 되게 해서도 안 된다. 이 지점이 사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신분 상승이 용이하기 위해서는 신분 하강 역시 용이해야 한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인데, 이상하리만치 우리 사회에는 이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신분 하강을 용이하게 하는 방법으로는 역시 상속세가 제일인 듯하다. 상속제를 부정하는 것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선택할 바가 되지 못한다. 여기서 '자신의 재산을 자기 자녀가 누리게 할 수 있는 권리'의 제한 문제가 등장한다. 신자유주의자들(예컨대, 노직(Nozick), 하예크(Hayek))은 이것이 자연권이라는 이유로 이를 적극 부정하여 조금도 제한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들은 존 로크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반대 측에서는 그런 것은 '권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2. 사회에는 힘들고 하기 싫고 대체가능성이 큰 직역들이 있다. 이런 직역에는 저렴한 임금이 대가로 주어진다. 이런 직역을 담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이런 직역을 담당하는 경우는 대개 그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이 사람들이 하류층이 된다. 이 기준에 따라 직역을 상층직역, 중층직역, 하층직역으로 구분을 해보면, 각 직역의 어느 정도는 사회에 꼭 필요하다. 다만 사람들은 위의 직역들을 원한다. 그러므로 하층직역의 종사 인구를 사회에 꼭 필요한 정도로 최소화하는 것이 정치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다만 중층직역의 종사 인구까지 최소화하여 상층 직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3. 현대 사회의 불행 요인 중 가장 커다란 것은, 자신의 계층을 납득하지 못하는 데 있다.
4. 자본주의에서는 대체가 어려운 인력일수록 돈을 많이 번다. 소득의 다과(多寡)는 노동의 어려움과는 연관성이 떨어진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또 한 가지 병폐가 발생한다. 소녀시대가 강원도 철원의 철책경계병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나은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소녀시대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철책경계병이 없으면 큰일이다. 이것은, 자원을 보유한 사람이 원하는 대로 자원이 흘러가는 것을 허용하는 자본주의의 태생적인 한계다. 예컨대 천안함 전사자들의 유족들이 '월드스타' 비의 가족들보다 "떵떵거리며"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물론 나는 비에 대해 아무런 악감정은 없다. 그저 한 예로 들었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수정과 제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는 망한다. 사실 어떤 직책이 아무리 중요하고 아무리 많은 소득을 가져다준다 하더라도, 일용직 노동자 하루 품삯의 100배 이상의 소득을 허용하는 것이 공정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5. 식민지 정복을 하지 않는 한, 한 사회의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는 하층민이 되어야 한다면, 국가의 할 일은 다음과 같다. ① 중산층의 수를 최대화 하는 것, ② 계층 이동에 있어서 공정경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 ③ 하층민의 물질적 · 정신적 박탈감을 최소화 하는 것이다. 이것들을 통해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계층을 납득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때 계층 이동에 있어서 공정경쟁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가진 자원이 자녀의 계층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자신의 자녀가 누릴 수 있게 할 권리'는, 권리로서 설혹 인정할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통하여 자신의 자녀가 동세대 중 우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권리'는 권리로서 인정될 수 없다.
6. A, B, C, D, E 이렇게 5명이 살고 있는 사회를 가정해 보자. 이 사회의 총 부(富, wealth)의 양은 1000억이다. A는 성실하게 일하여 999억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B, C, D, E는 각각 2,500만원씩을 보유하고 있다. 비록 A는 그들 간에 합의된 규칙에 따라 성실한 방법으로 999억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지만, B, C, D, E는 이것이 못마땅하다. 이때 이 못마땅한 감정을 합법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 사회에서 한 사람이 보유할 수 있는 부의 양을 한정하는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20세기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이 존재했다. ① 한 극단은 모든 구성원은 200억씩 균등하게 부를 분배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② 다른 한 극단은 한 사람이 보유할 수 있는 부의 양은 절대 제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많은 국가들은 ①도 아니고 ②도 아닌 중간의 어느 한 지점에서 경제 정책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유독 미국에 만큼은 여전히 ②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이 의회의 힘이다. 한 사람이 한 공동체 안에서 보유할 수 있는 자원의 양을 머릿수를 근거로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 정치세력과 대치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머릿수의 힘으로 어떤 개인의 부를 제한하는 것을 '붉은 색'으로 낙인 찍어왔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각 개인이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부를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정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구성될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한 인간으로서의) 머릿수의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 역시 정당한 권리의 행사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동등한 머릿수로서의 힘을 가지고 이것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화 된 사회다.
물론, 이 공동체가 유독 'A는' 100만원만 보유할 수 있다는 법을 만들거나, 모든 구성원이 1,500원 이상 보유할 수 없다고 하는 규칙을 만들 경우에는, 이 다수의 횡포로부터 헌법이 각 국민을 보호해 준다.
별론으로, 엘리트주의는 그것이 다수의 비엘리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려는 목적일 때에만 정당화 될 수 있다.
7. 나의 주장은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공동체 내에서 육체노동의 최대가치(쉽게 말해서 일용 노동자가 쉬지 않고 하루 14시간을 일했을 경우)보다 자본의 가치(쉽게 말해서 가만히 있어도 자본자체가 가져다주는 수익)가 더 높게 측정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8. 재산 보유의 정도 차이는 과연,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도 발생했을 일인가? 더 근본적으로는, 사유 재산이라는 것은 아담의 타락이 없었더라도 존재했을 것인가?
9. 교회는 신자들의 재물 사용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간섭해야 한다.
10. 하나님께서 또한 모든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먹고 누리게 하시고, 자기 몫을 받게 하시며, 자기의 일에서 즐거워하게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전도서 5장 19절]
[출처] 부의 분배에 관하여|작성자 플란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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