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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예정설의 역사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11. 24. 10:33
[잭 코트렐은 본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역사'로 목차를 설정했다. 그러나 브루스 웨어의 비판까지 고려해 볼 때 '예지예정설의 역사'로 제목을 설정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참고로 종교개혁은 초기 교부들의 철학화 경향에 대한 배척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①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은혜를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사람들 모두를 알고 계신다. ②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예지(豫知)에 기초해서 그들이 영생을 받도록 예정(豫定)하신다. ③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시며, 이들을 공의롭게 영원한 정죄로 예정하신다.
이것이 바로 고전적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예정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사실은 비록 이 입장이 “아르미니우스주의 관점”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 초창기부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생각 속에 있었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필립 샤프는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헬라 교부들은 “오직 조건적 예정만을 가르쳤다. 그들은 예정이 사람들의 자유행위에 대한 예지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고 관찰한다. 일반적으로 예지를 예정과 연결시키는 “헤르마스의 목자”를 보면, 2세기에 몇몇 교부들은 하나님의 예지를 인정했던 것 같다. 헤르마스는 왜 모든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보시고는, 순결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주신 반면, 마음이 악하고 교만해서 위선적으로 회개할 사람들에게는 회개를 주시지 않으셨다.” 같은 시기에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마지막 때(종말)에 대해 “선하고 고결하신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려진 사람들의 수가 완전해지는 때”라고 말한다. 또한 유스티누스는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천사들과 사람들이 확실히 멸망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다면, 그 예언대로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악한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들이 악한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기 때문이다.”

3세기에 오리게네스는 예언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 강하게 변호한다. 그는 예지가 자유의지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예지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지는 단지 사건의 단순한 미래성을 함축하는 것이지, 그 사건의 필연성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다. 오리게네스는 로마서 8장 29절을 관찰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은 스스로 고통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본받게 된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형상과 영광을 본받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예지는 예정에 앞서는 것이며, 예정은 예지에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예지는 예정의 원인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4세기에 암브로시애스터는 이 관점을 지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약속을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미래에 믿음을 가질 자들로 하나님이 알고 계신 사람들이다.” 로마서 9장 11절에 있는 야곱과 에서에 대해 암브로시애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 각자가 어떤 사람이 될지 아시고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믿을 사람들로 미리 아시는 사람들은 약속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 다른 4세기 저자인 다소의 디오도레는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보이지 않으시며, 또 다른 자는 완고하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지의 능력을 따라 각 사람에게 줄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해리 부이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도 칼빈주의적인 견해를 갖기 전에는, 초기 저작에서 이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지속적으로 예지에 따른 예정의 관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펠라기우스는 “믿을 것으로 미리 아신 자들을 하나님은 부르신다”고 말했다. 그는 로마서 9장 15절이 “나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미리 알았던 사람들을 긍휼이 여긴다.”는 의미라고 한다. 수년 뒤에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틈 사이에서 등장한 반(半)벨라기우스주의자들은 예정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결정론적 관점을 배격한다. 그러고는 지속적으로 “구원 예정은 믿음에 대한 예지의 조건화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캘리는 존 카시안의 말을 이렇게 요약하다. “하나님의 예정은 반드시 하나님이 예지하신 바 안에서, 우리 행위의 질이 되어야 한다.” 키르루스의 주교 테오도레트는 로마서 8장 29~30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단순히 예정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예지하신 자들을 예정하신다.” 즉 “하나님이 예지하신 자들을 영원 전에 예정하신 것이다.”

세 시대를 지나면서도 이 관점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와 함께 나란히 유지되었다. 부이스의 말처럼, 이 견해는 예를 들어, 둔스 스코투스, 윌리엄 오캄과 오캄주의자들과 같은 이들을 통해, “계속해서 등장했다.”

그러나 주요 종교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 편에 서 있었다. 물론 급진 종교개혁자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거부하거나 개정했고, 자유의지가 보편적으로 주어진 선행하는 은혜를 통해 회복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예정에 대한 고전적 아르미니우스주의적 관점은 결코 아르미니우스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아르미니우스 자신도 이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예정 교리를 요약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할지 정죄할지 작정하셨다. 이 작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신의 ① 선행하는 은혜를 통해 믿으려고 하는 그리고 ② 자신의 후행하는 은혜를 통해 견인하려 하는 개인들을 아셨다.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은 예지를 통해 믿으려 하지 않고 견인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아셨다. 아르미니우스는 “이런 예정 교리는 언제나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지금도 광범위한 후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이해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는 “하나님이 미래에 우연히 발생할 사건들, 특별히 피조물의 자유의지에 속한 일들을 어떻게 아시는지, 그 방식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지를 가지고 계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작정의 어떤 것들은 이성적 피조물의 예지된 자유행동에 의해 야기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는 작정은 “타락에 대한 예지에 의존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예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될 자와, 자신들의 잘못으로 믿지 않을 자를 아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이들을 정죄하시는 것은 “그들의 미래 죄에 대한 예지”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어떤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그들의 미래 믿음을 미리 보셨기 때문인 것이다. 이때 예지된 믿음과 관련하여 세 가지를 말할 수 있다. “(1) 믿음은 선택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2) 믿음은 선택받거나 구원받는 데 필수적 요소다. (3) 하나님은 선택받을 사람들에게 있는 이 필수적인 요소를 예지하셨다.”

뱅스가 말한 것처럼 결론은 이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그리고 주류 종교개혁자들이 배우고 따랐던 “예정과 예지의 관계를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후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은 특별히 영국에서 강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교리에 영향을 받아, 자신의 신앙으로 승격시키며 사람들을 가르친 존 웨슬리 때문이었다. 웨슬리는 로마서 8장 29~30절에 기초한 예정에 대한 설교에서 “하나님은 모든 시간에 걸쳐 믿으려고 하는 모든 나라에 있는 사람들을 예지하셨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 있어 예지는 사실상 예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현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지는 참으로 예지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마지막 날까지 있을 모든 세대를 보신다. 그리고 단번에 사람들의 모든 아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보실 것이며, 연령과 국적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 대해 그들이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아실 것이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지식은 그들의 신앙과 불신앙의 원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하나님이 전혀 모르신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자유롭게 믿을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 예지의 다음 단계는 예정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을 믿을 모든 이들을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작정하신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말한다.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정받았고, 또 하나님은 그렇게 예정한 모든 사람들을 이미 아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신자들로 보셨고 그래서 그들을 구원으로 예정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작정에 따라 ‘믿은 사람은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누가 예정되었는가? 오직 하나님이 신자들로 미리 알았던 사람들이다따라서 웨슬리는 로마서 8장 29절을 이렇게 설명한다. “믿을 것으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대부분의 아르미니스우스주의자들의 관점을 적절하게 요약한 것이다. 그들이 웨슬리주의자들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잭 코트랠,『선택이란 무엇인가』, pp.178 ~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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