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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정교분리의 역사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17:59

(1)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이나 정통 그리스도인이 더 나은 정치인이라는 사상도 퍼뜨렸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후보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위대한 개신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는 무능한 그리스도인 군주보다 유능한 회교도 군주가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무조건 유능한 정치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훌륭한 지도력은 특정 종교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후보자만 지지하거나 그들에게만 투표하는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점을 모르는 듯하다. 첫째는 미국이 정교분리를 보장하는 다원주의 사회라는 점이다. 둘째는 훌륭한 정부를 결정하는 것은 이성, 비전, 행정력 등이 결합된 선한 가치의 문제라는 점이다. 그러한 선한 가치는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가 없다.

  정교분리는 어떠한가? 여러 보수적인 복음주의 작가와 연사들은 정교분리가 기독교 신앙을 개인화하고 기독교의 공적인 발언을 억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잘못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정교분리가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나는 선뜻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정교분리를 그런 식으로 오용하는 세속주의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말은 원래 그런 뜻이 아니었다. '정교분리'라는 말은 토머스 제퍼슨이 종교세가 다른 교단으로 가거나 특정 교단의 회원만이 입법에 참여하는 것을 우려했던 뉴잉글랜드의 침례교단에 보내는 편지에서 최초로 썼던 용어이다. 제퍼슨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장벽'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는 어떤 교단이나 종교도 미국인을 장악해서는 안 되며, 특정 교단에 소속되거나 소속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도 안 된다는 취지에서 이 표현을 사용했다.

  여러 보수주의 복음주의자들은 정교분리를 비판했는데, 이는 일부 자유주의자와 세속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정교분리가 오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 시민 단체는 가톨릭 주교들이 가톨릭교도인 국회의원들에게 낙태 허용 법안에 반대하라고 경고하자 정교분리의 원칙을 어겼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가톨릭 주교들이 낙태 허용 법안에 찬성하는 국회의원들을 파문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 시민 단체는 헌법이 교회의 교인 훈육을 금하기라도 하는 양, "정교분리 원칙 위반!"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세속주의자와 자유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것과 반대로, 정교분리는 교회와 종교 단체가 정부를 설득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말의 뜻은 어떤 교회나 교단이나 종교단체라도 정부를 지배하거나 정부 안팎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보수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정교분리의 원칙이 오용되는 것에 과잉 반응하여 오히려 그 원칙을 없애려고 한다. 그들은 국회가 종교의 자유(미국 수정 헌법 제2조)에 손대지 못하는 것에는 만족하지만, 기독교가 '정부의 양심'으로서 특권적인 지위를 갖게 하기 위해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장벽'을 무너뜨리려고 한다.  [로저 E. 올슨,『How to be evangelical without being conservative』, 79쪽 ~ 81쪽]


(2) 종교개혁 후에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 중세교회의 분열은 기독교 세계의 종교적 통일을 이미 깨트린 상태였으나, 양 진영은 계속해서 영토에 부종하는 교회관을 견지하고 있었다. 즉 특정한 나라 혹은 지역에 살고 있는 자는 누구나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16세기 말에서 17세기에 걸친 1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 전체가 종교전쟁에 휩싸여 버렸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피해 자기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도망치는 종교적 난민이 되었다.

  이처럼 한 세기에 걸친 종교전쟁은 도덕과 정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종교적 이견을 두고 기꺼이 피를 흘리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기독교 이외의 다른 곳에서 사회질서를 위한 토대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교로부터 자율적인 세속적(世俗的) 담론의 장을 찾았다. 그것이 싸움에 빠진 종교 분파들 간에 평화를 가져올 '중립적' 영토의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제프리 스타우트가 설명하듯 많은 이들이 비종교적인 수단을 마련해서 공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 외에는, 신앙의 차이에 따른 폭력적 결과를 봉쇄할 길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가는 제도적으로 교회로부터 독립해 있기는 하였으나, 하나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실체로 간주되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정된 국가의 의무는 정치 공동체의 공동선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공동선이란 절대적인 공평과 자비와 정의(이런 용어들은 신적 계시에 의거해 정의되었다) 같은 도덕적 견지에서 규정되었다.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만국을 다스리는 신의 의로운 통치에 참여하거나 혹은 그것을 중재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거기에는 "참종교"를 보호하고 교회를 지원하는 의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사람들은 어느 교회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간의 백년전쟁을 겪은 후에는, 국가가 어떤 교회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다수가 응답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국가의 도덕적 기능까지 반대하기 시작했다. 도덕이란 종교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선'을 지지하는 종교적 개념은 그와 경쟁관계에 있는 종교에 의해 도전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낸시 R. 피어시,『완전한 진리』, pp.702 ~ 703]

(3) 크리스천들은 자연론자들과 유물론자들을 포함해 비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위한 장소를 내주는 데 동의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고 주권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헌신은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공공장소에서 크리스천들의 활동을 금지시키는 몇몇 법안들에 담겨 있는 강제적 세속화 정책(교육을 종교에서 분리시키려는 견해)에 반대한다. 기독교 원리를 국가의 법으로 세우고 싶어서 그와 같은 반대 운동을 펼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 나라가 지닌 영적인 본질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자유로운 종교 활동과 다양한 신앙에 대한 억압은 불신자들은 물론이고 크리스천에게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열정을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시키자. 그러나 그 일은 강제적인 방법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통해 추진해야 한다. 물론 물리적 힘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신앙을 제한하거나 억압하지 않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허용하는 정부 형태는 잘 보존해야 할 것이다. [존 파이퍼,『최고의 하나님을 맛보라』, pp.93 ~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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