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가치에 관한 논쟁 본문
(1) 법학교수 스티븐 스미스(Steven D. Smith)는 주목할 만한 저서 『세속적 담론에 대한 자각』(The Disenchantment of Secular Discourse)에서 통속적인(secular) 세계, 특히 정부와 정계 그리고 학계에는 그것을 지배하는 어떤 토론 규칙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아무도 공적인 논의에 신앙적인 신념을 끌어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도덕적 정당성이라든지 윤리적 악(惡)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일종의 금기 사항이다. 그랬다가는 어떤 종교적 신념이 진리인가를 두고 끝없는 입씨름이 벌어질 게 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자유와 평등에 관해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용어들만 가지고 정의를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인간의 정의관은 인생관, 즉 실증할 길이 없는 신앙적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공적인 담론에 쓰이는 세속적인 어휘들은 규범적인 신념과 원칙을 온전히 전달하기에 불충분하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규범적인 사안들을 논의하려 든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관념들을 슬적 끌어들이는 방식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똑 부러지게 표현할 길이 없는, 그래서 자신조차도 설득하지 못하기 십상인 원칙들을 은근히 끌어들이다 보니 담론은 툭하면 벽에 부딪히고, 후련하지 않고, 피상적이 될 수밖에 없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체벌은 아동의 권리와 품위를 침해하므로 불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스미스는 인간은 존엄하다든가, 인류는 소중하고 신성한 권리를 가졌다는 관념을 뒷받침할만한 세속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고 단언한다.
… 세속적인 담론의 규칙은, 상대방은 물론 자신조차 설득시키지 못한 저마다의 도덕적 가치 판단을 그대로 둔 채로, 사람들이 논의에 뛰어들게 만든다. 따라서 차이의 핵심에 관한 더 깊은 토론은 아예 시도조차 못하는 것이다.
… 마이클 샌델은 이렇게 말한다. "법은 도덕적 신앙적 문제들에 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낙태를 허용하는 건 금지하는 경우보다 눈곱만큼도 중립적이지 않다. 양쪽 입장 모두 근원적인 윤리 및 신앙적 논란에 대한 해답을 상정하고 있다."
…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토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서 그렇지, 정의에 관한 모든 설명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종교적인 가정들이 깔려 있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이슈들에 대한 논란이 교착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신념을 곧이곧대로 털어놓지 못하는 한, 정의의 본질에 대한 합의를 이룰 길은 없다.
… 샌델과 스미스를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은, 도덕과 종교적인 믿음을 공개적인 논의의 장으로 끌어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속적인 공개 담론 규칙은 그런 문제를 거론하는 걸 용납하지 않는다. 신앙적인 신념에 관계된 토론은 대중 사이에서 끝없는 의견 다툼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도덕적 종교적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탓에 이미 충돌에 휘말린 상태다. 게다가 진정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대놓고 토론하지 못하다 보니, 상반된 입장을 가진 이들을 설득하는 대신 무력화시켜서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권력 투쟁을 벌이기 일수다. 이런 담론 규칙과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티모시 켈러,『팀 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 pp.218 ~ 222, 233 ~ 234]
(2) 오늘날 국제법의 주춧돌 노릇을 하는 건 신성성, 즉 인류에게는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 신성함 즉, 하나님이 만드신 또는 그분으로부터 지음받은 인간으로서 이웃이 가진 고귀함에 거스르는 범죄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반인륜적 범죄라는 개념은 크리스천의 사고방식이며 기독교의 유산, 아브라함의 유산, 성경의 유산을 제외하면 오늘날 그 어떤 법률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자끄 데리다]
(3)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이 신앙인들에게 공적인 자리에 들어오기에 앞서 문간에 신앙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하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프레더릭 더글러스, 아브라함 링컨,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도로시 데이, 마틴 루터 킹을 포함해서 미합중국 역사를 장식했던 위대한 개혁가들 가운데 대다수는 신앙에 기대어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언어를 반복적으로 구사해 가며 저마다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므로 공공 정책을 다루는 토론에 '개인의 도덕성'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건 사실상 모순입니다. 우리의 법은 두말할 것도 없이 도덕을 체계화한 결과물이며, 그 상당 부분은 유대-기독교의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4) 인간을 포함한 세상을 누군가가 ①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으며, ② 그 누군가를 책망할 수 있는 상위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음이 논증된다면, 가치의 영역에 있어서도 정답이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게 된다. [유대웅]
(5) 쌍방이 가치 혹은 가치판단방식(valuation)을 공유하지 않는 경우에는 쌍방 모두 수긍하는 타협책을 도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쌍방 주장의 당부를 판단할 공통의 척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가치분쟁"에 있어서는 부득이 쌍방이 중립적이라고 인정한 제3자를 개입시켜 그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으면 끝없는 전쟁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히라이 요시오에 따르면, 가치분쟁에 있어서 제3자가 행하는 결정이 '법적 사고양식'을 낳는 근원이 된다. [조홍식, 『사법통치의 정당성과 한계』, pp. 7 ~ 8]
(6) 우리가 공공의 담론으로 들어설 때, 그리고 공공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논쟁하기 시작할 때면 대다수는 결코 종교적인 이유를 활용해서는 안 되고, 오직 세속적인 이유만이 허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곧바로 자신들이 제안하는 것에 대한 종교적인 이유를 듭니다. 이것이 대화를 중단시키는데 그 종교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사회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곧바로 우리가 가진 세계관을 통해 논쟁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을 서사적 정체성(narrative identity) 혹은 삶의 의미에 대한 이해라고도 합니다.
… 문화인류학 교수였던 캐롤린 플러 로반(Carolyn Fluehr-Lobban)은, 모든 도덕은 기본적으로 사회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의 도덕관을 다른 문화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캐롤린이 아프리카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여성에 대한 끔찍한 억압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 거기에서 아프리카 사회의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현재 여성에게 하고 있는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려 했을 때 …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치를 우리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당신이 가진 종교적 신념을 우리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거요."
캐롤린은 자신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곧 자신이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은 세속적인 인본주의자였고 인권을 믿고 있었습니다. 인권은 모두에게 자명한 것이 아닙니다. 인권은 우리가 증명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권을 믿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의지가 필요합니다. 거기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최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특권적 세속주의와 절차적 혹은 소극적 세속주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권적 세속주의는 공공 영역에서 법에 대해 논쟁을 할 때, 우리가 전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관은 세속적 세계관, 즉 계몽적 개인주의 세계관뿐이라고 말하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립적인 법 체계를 확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다른 특정 세계관을 공공 영역에서 수용한다면, 그것은 국가 주도의 종교를 수립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절차적 혹은 소극적 세속주의는 입장이 조금 다릅니다. 국가가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데에는 특권적 세속주의와 같은 입장입니다. 국가는 세금으로 특정 종교나 종교 단체를 지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개인은 공공 영역에서라도 특정 종교적 신념에 기반해 특정 사회 규약이나 공공 정책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 주장이 폭넓은 대중에 호소력을 가진다면 공공 영역에서도 관철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주장에 담긴 종교적 색체가 공공연하든 은밀하든, 암시적이든 명시적이든 말입니다. [팀 켈러,『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pp.83 ~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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