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기독교인의 정치적 입장 본문
나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입장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본다. 누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답해야 한다고 본다.
(1) 우리는 사항별로 판단해야 한다. 어떤 정당이 내놓는 정책을, 그 정당이 내놓는 정책이기 때문에 지지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인물이 내놓는 정책을, 그 인물이 내놓는 정책이기 때문에 지지해서도 안 된다. 이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지해야 할 정채이 어떤 정책인지, 저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가 지지해야 할 정책이 무엇인지의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물론 어떤 정당이 내놓는 정책이나 어떤 사람이 내놓는 정책이 언제나 우리가 마땅히 지지해야 할 정책과 일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그 정책에 대한 지지 이유가 그 정책 자체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 비그리스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이와 같은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이성적인 방법이다. 어떤 정책을 지지하는 이유가 정책 자체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 정책의 내용을 보지도 않고 그것의 당부(當不)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판단 공정의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항에 따라 좌파 정당을 지지할 수도 있고, 우파 정당을 지지할 수도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만일 자신이 어떤 한 정당만을 지속적으로 지지해 왔다면 자신이 지금껏 부당한 입장에 서 있었다고 생각하면 맞다.
(2) 두 번째로, 정치를 음모론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바로 위 내용의 연장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입장에 반하는 정책을 펴는 경향이 있는 정당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지해야 할 제대로 된 정책을 펴는 경우가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입장에 합치하는 정책을 펴는 경향이 있는 정당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반대해야 할 정책을 펴는 경우도 많다. 어떤 사람들은 보수정당이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입장에 합치하는 정책을 펴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진보정당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반대 정당이 하는 짓에는 항상 무언가 다른 저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당한 생각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측 모두 그들이 하는 짓에는 항상 이기적인 다른 저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3) 세 번째로, 역시 같은 이야기의 반복일 수 있지만, 어떤 정당이나 어떤 정책에 대해 너무 많은 기대와 지지를 표명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간의 근본적 타락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석음과 허영, 미친 기운, 무지와 자만, 이기심과 아집, 이유 없는 마음의 분주함이 인간의 내면세계에 도사리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내면세계에 예외 없이 이것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다. 무언가 제대로 올바르게 가다가도 꼭 똥을 쌀 것이라 생각하면 맞다.
(3-1) 이 부분은 꼭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입장이라기 보다는, 일반 국민으로서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것이다. 정치인들은 서로 꽤 친하다. 자신들을 지지해 주는 국민들에 대해서보다 매일 여의도에서 마주치며 함께 일하는 상대당(黨) 정치인들에 대해 더 친근감을 갖고 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데 잘 생각해보면 나 같아도 상대당 국회의원과 친하게 지낼 것 같다. 왜냐하면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일단 보통 사람이 아님을 입증한 것이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권력과 사회적 자본을 갖추었음을 일단 입증한 것이다. 친하게 지내면 언젠가 덕볼 일이 있을 것이다. 무조건 친하게 지내야 한다(!!) 누가 아는가? 우리 자식 놈이 취업못하고 빌빌대는데 저 아저씨가 어디 한 자리 꽂아 줄지? 농담은 그만하고, 실제 정치 구도는 [A당 국회의원 + A당 지지 국민] VS [B당 국회의원 + B당 지지 국민]의 구도가 아니다. 이렇게 보도록 언론이 호도해 가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 속은 것이다. 실제의 이익상황은 [국회의원] VS [국민]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려는 국회의원과 국민을 위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통제하려는 국민 간의 대립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국회의원들이 어떻게 하면 국민의 눈치를 보게 할 수 있을까? 아주 효과적이면서 확실한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 언제나 투표하고, 또 국민들이 언제나 유동층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투표율이 90%를 넘어가고 누가 나를 지지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정권을 계속 교체 시켜야 한다. 그러면 전 정권의 비리가 계속 폭로될 수 밖에 없다.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일관된 지지를 보내는 것은 적어도 이익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일이다.
(4) 네 번째로, 논점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이 글에서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무엇인지’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기로 한다)와, ② 그것에 기여할 수 있는 정책이 제도화되어야 한다고 보는지는 구분해야 한다. 이 둘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는, 어떤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형성된 질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과 그 결과에 있어서는 같다 하더라도, 그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그 질서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국교화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당연히 나는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만 모인 공동체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어떤 국가 내의 모든 사람이 일요일에는 교회에 출석해서 설교를 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을 처벌하는 제도를 만드는 일에는 반대한다. 반대로 이 말은, 각 개인의 내면적 지지와 상관없이 외적 결과만으로도 선한 것이 되는 사항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법제화 하는 것을 지지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는 빈부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는 제도가 그렇다. 물론 이것도 그 수단에 따라서는 부절절한 제도가 될 수 있다.
(5) 다섯 번째로, 비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지지하는 어떤 정책을 지지해주길 바랄 때 하나님을 논거로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비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지지하는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두고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표현해 볼 수도 있다(그들의 '객관적 도덕성'에는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받아들이 원칙과 일치하는 행동을 하는지 여부를 뜻하는 '주관적 도덕성'에는 하등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객관적인 도덕 기준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끔 TV토론에서 비그리스도인을 상대로, ‘이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을 본다. 부당한 논증이다. 나는 그럴 때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 누구냐"라고 답하라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다. 비그리스도인이 어이없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논쟁을 할 때는 비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고 있는 원칙만이 근거로 제시되어야 한다. 한편 그들의 주장에 제동을 걸 수 있는 논거들은, ① 어떤 정책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 시행하는 것보다 공동체 전체에 손실을 가져다 준다면 시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익형량의 원칙), ② 네가 당하기를 원치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역지사지의 원리), ③ 아무리 네가 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해악의 원칙) 정도 뿐이다.
(6) 여섯 번째로, 지지하는 정책이 (당연히 그 이유에 있어서는 다르겠지만) 동일하다면 우리는 비그리스도인들과 연대할 수 있다.
(7) 일곱 번째로, 이것은 반대 의견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데, 나는 이 입장이 진리라고 일단 믿고 있다. 이상(理想)세계는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이 땅위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훨씬 덜 부정의하고, 훨씬 더 살만한 세상을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 수는 있지만 그것뿐이다. 이상세계를 뜻하는 의미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 만들어져 기성품(旣成品)으로 이 땅에 임한다.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정치적 현상에 대해 너무 쉽게 분노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근본적 타락 교리를 잊었는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다. 또 만일 우리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악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면 우리는 아마 24시간 분노상태에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타락했기에, 24시간 1분 1초도 쉬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는 악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의해서 쉴 새 없이 하루에 수십 가지의 악이 발생하고 있다. 왜 꼭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사안들에 대해서만 분노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진실로 근본적 타락의 교리를 믿는다면, 우리가 별다른 애를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분노할 만한 사건들을 주변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사안들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것은 너무 선택적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나는 부정선거를 저지른 정치인에 대해서보다(이게 왜 별다른 악이 아닌지는 바로 아래에서 논한다), 낳아주고 길러 준 부모에게 분노하는 내 친구한테 하나님께서 더 분노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는 사실 학습된 분노일 수 있다.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인간은 무엇에 대해 분노할지도 사회적으로 학습한다. 심리학에서는 흔히게 알고 있는 일이다.
(8) 여덟 번째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지하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니다. 민주주의는 소중하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유지되도록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자체 고수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선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사상적 산물이기까지 하다. 민주주의가 소중한 것은 그것 때문에 수많은 폐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도 민주주의 자체를 선으로 보지도 않으신다. 만약 그랬더라면, 독재나 왕정이나 제정(帝政) 자체를 문제 삼으셨을 것이다. 이 점 때문에 기독교는 독재정권과 결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러한 결탁 자체를 지지하고 찬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원래 기독교 자체가 그럴 만한 소지를 담고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 '자체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이다. 기독교는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정치 체제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은 정치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C.S.루이스 같은 사람은 민주주의에 대한 언급에서, 인간 사이에는 신분상의 위 아래가 있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라고까지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A)가 민주주의의 여러 파생 원칙들을 훼손하긴 했지만, 그에 의해 다른 누군가(B)가 죽거나 다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일이 없다면, 우리는 조용히 그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람(A)에 대해 반대하는 마음을 품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 다음에 투표하지 않으면 된다. (맞다. 민주주의는 투표권도 보장한다. 투표를 통해 통치 권력을 교체하는 것도 가능한 제도다. 정말 좋은 제도가 맞다. 이점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객관적인 선도 아니고, 민주주의에 대한 유린 자체가 객관적인 악도 아니다.
(9) 아홉 번째로, 정치에 대한 나의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적극적 참여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고 소위 '기독교 좌파'에 의해 비난 받을 수 있다. (참고로 '기독교 좌파'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정치적으로' 좌파 정당을 지지하는 기독교인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내에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기독교를 개인 구원의 문제로 축소시킨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좌파야 말로 하루에 최소 2시간 이상 정치 관련 기사를 꼼꼼히 들여다 보고, 공권력의 부당성에 분노하며, 정치인들의 도덕적 흠결을 찾아내야 하는 것으로 기독교를 축소시킨다고 본다. 무엇이 기독교인의 마땅한 삶의 자세인지는, 추상적인 논리의 관념 연산으로 논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우리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무엇을 하며 보내게 만드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10) 끝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소수민족일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수 많은 주류 민족들 사이에 둘러 싸여 사는 소수민족일 것이다. 따라서 세(勢)를 불려서 정치적으로 무언가를 해보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시도다. 이것은 누군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의 도덕적 가치와 판단을 자신의 최종적인 가치와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살게 되고 누구는 그렇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 측에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누구는 그리스도인지 되지 않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이유가, 우리 인간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렇다 나는 칼뱅주의자다.) 성경의 기록과 그분이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하시는 실을 보았을 때, 교회에 출석하는 인원은 그 사회의 다수가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수는 언제나 소수다.
(11) 기독교 좌파와 기독교 우파에 관해서는 http://yyydddwww.tistory.com/157 글을 참조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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