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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트렌트 공의회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6. 02:34

 종교개혁 초기의 교황들은 보편 공의회의 소집을 반대하였다. 왜냐하면 일찍이 교황보다 종교회의가 우위임을 주장한 공의회 수위 운동의 부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분열이 항구화된 바울 3세의 재위 기간에야 '비로소' 로마에서는 보편 공의회의 소집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각종 복잡하고 난해한 협상 끝에 공의회가 1545년 12월 트렌트에 소집될 것이 결정되었다.
  … 이론상으로 볼 때는 이 회의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계속된 것이었으나, 그 기간의 대부분은 휴회 상태에 있었다. … 트렌트 공의회 이전의 대부분의 공의회들은 몇 가지 문제, 혹은 이단으로 고려된 교리 문제들만 다루었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 당시에는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광범위하였으며 교회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므로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프로테스탄트주의를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의문을 제기한 신학의 문제들을 취급해야 했다.
  … 트렌트 공의회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구를 장려하여 그의 신학을 가톨릭 교회의 주류로 삼았다. … ① 라틴어판 성경인 벌게이트가 도그마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권위를 지닌다는 것, ② 전통이 성경에 상응하는 권위를 지닌다는 것, ③ 성례는 일곱가지라는 것, ④ 2종 성찬 즉 평신도들이 빵과 포도주를 모두 받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 ⑤ 칭의는 은혜와 신자 사이의 협력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선행에 기초한다는 것 등등을 선포하였다.
  … 트렌트 공의회는 현대 가톨릭 교회의 탄생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 현대 가톨릭 교회는 루터가 저항하였던 중세교회와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한 반작용의 흔적을 지니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 4세기 동안 이러한 반동의 결과로, 로마 교회는 트렌트 공의회가 부인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많은 요소들이 기독교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20세기에야 비로소 가톨릭은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벗어난 별개의 개혁 방안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후스토 L. 곤잘레스,『종교개혁사』, pp.205 ~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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