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사단 칠정 논쟁 본문
사단 칠정논쟁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사단과 칠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사단은 측은시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네 가지 마음을 가리킨다. 맹자 이래 주희까지도 이 네 가지 마음은 모두 본성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반면 칠정은 『예기』라는 책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으로서, 기뻐함(喜), 노여움(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함(愛), 싫어함(惡), 욕망함(慾)이라는 일곱 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사단을 본성으로부터 출현한 마음의 양태라고 한다면, 칠정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마음의 양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칠논쟁은 정지운이라는 유학자가 자신이 지은 『천명도설』을 이황에게 보여 준 데서 발단이 되었다. 『천명도설』에는 “사단은 이에서 드러난 것이고, 칠정은 기에서 드러난 것이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었는데, 이황은 이 구절은 “사단은 이(理)가 드러나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드러난 것이다”라고 고쳐 준 적이 있다. 당시 정지운이나 이황 누구도 자신들의 이런 간략한 대화 내용이 조선 유학계를 일대 철학논쟁으로 몰고 가리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다.
본격적인 사칠논쟁은 이황에 의해 수정된 『천명도설』을 기대승이란 인물이 보고 나서,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대승은 “사단은 이가 드러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난 것”이라는, 이황이 고친 문구를 논박하기 위해 편지를 띄웠다. 당시 기대승이 이황의 관점을 반박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았다. 사단이 본성에서 직접 드러나는 것으로서 이(理)가 드러난 것이라면, 칠정은 본성과는 무관한 사적인 개체의 감정으로서 기(氣)가 드러난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을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이황과 다른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분명 사람에게는 윤리적인 마음도 나올 수 있고, 혹은 그렇지 않은 현실적인 마음도 실현돼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이(理)와 기(氣)는 동시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 기대승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단을 “본성이 발할 때 기(氣)가 잘못 작용하지 않으면 본연의 선이 곧 이루어지는” 경우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의 경우도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계기가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기대승은 사단이라는 마음도 결국은 칠정으로 대표되는 현실적인 마음들 가운데 특히 절도에 맞는 윤리적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편 이황은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 나서 그의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황은, 사단을 현실적인 마음 가운데 포함된 윤리적으로 타당한 마음이라고 본 기대승의 견해를 전부 수용할 수는 없었다. … 타협책으로 나온 이황의 해법은 사실 단순했다. 사단과 칠정 모두에 이(理)와 기(氣)라는 범주를 적용하지만, 사단에서는 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칠정에서는 기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었다. 사단과 칠정에 이제 이와 기라는 범주를 동일하게 적용하자고 본 이황의 생각은 기대승의 반박을 일부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그는 사단의 고유성, 혹은 사단의 우월성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단이란 마음은 칠정으로 상징되는 현실적인 마음의 양태들 가운데 윤리적인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황은 자신의 사단칠정론을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理)가 타는 것입니다.” 이와 기를 사단과 칠정의 경우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하면서도, 사단은 이(理)가 중심이 되어 실현되고 칠정은 기(氣)가 중심이 되어 드러난다는 매우 절묘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황의 타협책은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성혼이란 인물이 이황의 사단칠정론을 옹호하자, 이이는 성혼과 논쟁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멘토이기도 했던 이황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 이이의 비판도 “사단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타는 것이다”라는 이황의 주장에 초점이 있다. … 이이는 “기가 드러날 때 이가 탄다”라는 이황의 주장은 긍정하면서도, “이가 드러날 때 기가 따른다”라는 이황의 주장은 부정했다. 이이가 보았을 때 “이가 드러날 때 기가 따른다”라는 이황 논리의 핵심은 결국 이(理)가 먼저 드러난다는 것을 그대로 주장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황이 “사단은 이가 드러난 것이다”라고 말한 처음 입장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이는 사단 가운데 하나인 측은지심을 이기(理氣)라는 범주로 다시 분석하면서 이황의 논의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다. 측은지심은 『맹자』의 사례에서도 설명된 것처럼,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발생하는 선천적인 마음이다. 이 경우 측은지심은 타인의 불행에 대해 공감하게 되는 일종의 동정심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황은, 이 측은지심이 우리의 현상적 의식이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므로, 이 측은지심을 내면의 본성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실현되어 나온 마음이라고 본 맹자의 관점을 따르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사단을 “이(理)가 드러난 것” 혹은 “이(理)가 드러날 때 기(氣)가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이는 “갓난아이를 보고 측은해지는 것” 자체가 바로 기(氣)라는 범주로 설명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갓난아이를 본다”는 경험적 사태에 주목하고 있는 이이의 의도이다. 과거에 주희는 만물이, 개체성 혹은 개별화의 원리로서의 기(氣)와 공통성 혹은 동일성의 원리로서의 이(理)라는 두 범주로부터 생성된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맥락을 토대로 이이는 “갓난아이를 본다”라는 행위가, 만물에 공통된 원리라는 차원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개체성의 차원을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당연히 이이는 아이를 보는 지각 작용은 개체성의 차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각 작용은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대상 간의 구별, 즉 개체적 구별이 먼저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단계부터 그의 논증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갓난아이를 보았을 때에만 측은지심이 생긴다면, 결국 갓난아이를 보았던 기(氣)의 측면에 수반되어 측은지심이라는 마음이 드러나는 것이고, 이 마음을 통해 비로소 이(理)가 기(氣) 안에 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이는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기가 드러나서 이(理)가 탄다는 (이황의) 말은 옳지만, 단지 칠정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단 또한 기(氣)가 드러나서 이(理)가 타는 것입니다.” [강신주,『철학 vs 철학』, pp.720 ~ 726, 내가 표현을 다소 수정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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