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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론

보수주의 신학교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5. 17:03

"나를 추종하려 하지 말고 나와 씨름하려 하라" - 헤르만 바빙크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신학적 노선에 대한 회의(懷疑)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선택해서 들어가게 된 학교가 따르고 있는 신학적 노선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입학전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 학교에 입학한 후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낭패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잘못도 아니고 신학교의 잘못도 아닙니다.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신학교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미리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신학교에 갑니다. 우리는 거기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는 신학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채, 어떤 한 신학교를 선택해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보낼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나중에 신학교가 따르고 있는 신학적 입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반복하지만 이것은 학교의 잘못도 아니고 학생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이유에서 여러분은 많은 회의와 갈등과 번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습니다. 별다른 좋은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기억하셔야 할 것은, 좀 비딱한 측면에서 이러한 구조적인 현실을 바라본다면, 신학교는 자기들 사상에 동조할 젊은 추종자들을 하나라도 더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상당 정도 사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신학교의 다양한 신학적 입장들을 충분히 검토해 본 후에 여러분이 따를 입장을 골라서 신학교에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될 것입니다. 문제 제기만 하고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그 신학교에 대해 알아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로 말씀드릴 것은, 은근히 많은 신학생들이 실제로 호소하는 어려움들 중 하나인데, 여러분은 신학교를 졸업할 쯤이 되면,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 회의를 가질 우려가 있습니다. 예컨대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성경이 어떻게 전수되어 왔는지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신앙을 상실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또 신학교에 입학할 때는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인생살이가 여러분이 굳게 믿고 있는 단순한 믿음의 틀들만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더 나이가 들어서는 인생이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내가 기존에 알아왔던 단순한 틀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며 겸손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분의 지성이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존재나 통치 자체를 부인하며 신앙을 버리게 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신학교 4학년 쯤 되었을 때는 공무원 시험이나 취업을 준비하고 있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말씀드리려는 것은 신학을 하면서 부수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배타성과 편협성에 대한 것입니다. 편협성은 언제나 배척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배타성 역시 그 배타성에 의해 배제되는 타인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때만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기도하기 싫어하는 부패한 마음과 일평생 싸워야 하듯, 신학생들은 이에 더해서 편협성, 배타성과도 평생 싸울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좁아지면 안 됩니다.
신학교에 가면 편가르기를 배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신학교의 설립 목적 자체가 자기 교단에 필요한 목회자를 배출해 내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신학교 제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것은 신학교가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결과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드립니다. 이 경향에 저항하셔야 합니다. 신학생들은 언제나 '그 사람 어느 라인인가?'를 살피는 듯 합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칼빈주의자입니다.) 이것이 제가 신학생들로부터 받은 인상입니다. 개혁주의자가 되는 것이 신학공부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제로 교수님들은 '한 한생이라도 충성된 개혁주의자로 길러내는 것'을 자신들의 교수(敎授)의 목표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점에서 속으로는 교수님과 딴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표리부동(表裏不同)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정통 신학이 과연 진리인가? 왜 그런가? 과연 그런가? 왜 그런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야 합니다. 적어도 '공부 할 때'만큼은 체계옹호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체계비판적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섯 솔라(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나 5대 강령(TULIP)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까지 체계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적어도 공부할 때는 그렇습니다. 공부할 때 이렇게 해두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학교 문을 나선 다음 부터는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여러분은 그 신학에 여러분의 인생을 헌신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생각 없이 동의하고 있던 신학의 내용에 대해, 졸업 후에 동의할 수 없게 되는 것만큼 낭패스러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에 여러분의 인생을 헌신할 것을 요구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매사에 비판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학문을 하는 일에 있어서 최악의 논법(argumentum)은, 주장은 있으되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생들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많이 배우지만, 왜 그렇게 믿어야 하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제시되고 있는 근거는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신학교에 있는 동안 정통신학이 왜 타당한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한지 왜 그런지에 대해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타당성을 우리 시대의 언어로 재확인하고 재발견하셔야 합니다. 이 교리가 과연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만한 것인지 검토하셔야 합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어떤 형편에서도 절대적인 소망이다'라는 결론만을 배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가, 진짜로 그런가를 세속의 언어로 풀어내는 방법을 배워서 나오셔야 할 것입니다. 학교에는 칼빈, 오웬, 하지, 워필드, 바빙크, 튜레틴, 벌코프라고 하면 '그저 빨아대는' 동료들과 교수님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사람들 치고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을 정직하고 겸손하게 검토해 본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한 신학교 내에서는 같은 신학을 공유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다보니, 체계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의 폭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무신론자, 유니테리언,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카톨릭 신학자, 이슬람 교도인 친구를 옆에 두고 있다 생각하며 공부하셔야 합니다. 이 친구들 앞에서도 정통 신학의 타당성과 진리 합치성을 설명할 수 있겠는지 항상 생각하며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학교에서 배운 교리가 진짜인지를 현실에서 계속해서 검증해보려는 태도는 매우 바람직합니다. 적어도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동안에는 그렇습니다.
  또 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온 세상의 학문을 끌어 안는 것이다 보니, 배운 것은 신학뿐이면서도 신학생들은 마치 온 세상의 진리를 알고 있는 듯 생각하기 쉽습니다. 최악의 경우는 신학교에서 편협성과 독선, 소통불능만 배워서 나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이 최악의 사태는 꽤 자주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학은 온 세상의 모든 학문을 교정하고 책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직접 다른 학문들을 해보기 전에는 여러분의 견해는 다소 (어쩌면 꽤 많이) 불완전하고, 오류가 있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학문들에도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특별히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학문들 즉 의학, 철학, 법학에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예컨대 추정과 간주의 법리를 알게 되면 칭의의 의미를 더 온전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현대에 허락해주신 학문들 중 심리학, 사회학에도 귀를 기울이셔야 합니다. 이 분야들에 정통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 학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엇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반은총의 빛 아래서의 재미있고 탁월한 발상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발상들은 역(逆)으로 신학자들의 오류를 교정해 줄만한 것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분명'이라는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에 주목해 주십시오.)
  또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도 이해하셔야 합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의 유년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실제 이야기 입니다. 편의상 "철수"라 하겠습니다. 철수는 경기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술집에서 만났습니다. 어머니는 유흥업소 종사자였고, 아버지는 조직폭력 단체의 하급 활동원(?)이었습니다. 철수가 커서 말귀를 알아 들을 때가 되니, 어머니는 이미 자기를 낳지마자 집을 나간 상태였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 상태였습니다. 아버지는 밤마다 술을 마시고 철수를 폭행했습니다. 폭행의 이유는 '너를 보면 집나간 니 애미가 생각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삶이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돈을 벌겠다고 하며 집을 나가셨고, 철수는 충청도의 큰아버지 댁에 맡겨졌습니다. 철수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가서 큰아버지 댁의 농사일을 거들고, 소 먹이를 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늦게 오거나, 일이 시원치 않을 때에는 그날 밥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큰어머니는 철수를 애물단지 취급하셨고, 정확히는 노예취급 하셨습니다. 철수는 학교에서도 의기소침했고,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5학년 때 아버지의 사망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버지는 작은 방에서 홀로 목을 매달고 자살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철수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에게도 이렇게 많은 피붙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모, 작은 아버지, 사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철수를 그렇게 괴롭히던 큰어머니 역시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셨습니다. 철수는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빚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어쨌든 그 후 철수는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만났던 고모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고모는 철수를 아껴주셨습니다. 그러나 고모 역시 남편과 이혼한 상태에서 혼자 살고 계시던 차였습니다. 그래서 고모댁에 1년도 채 있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모님이 돈 벌이를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철수를 돌보아 줄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고모님의 수입은 두(二) 입을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수는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거기서 철수는 아이들에게 시달렸습니다. 수시로 폭행당했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3학년까지 그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던 중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철수는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한 수녀님에 의해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정서의 안정을 찾아, 그때부터 안정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후 성실하게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입학합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아이는 비록 서울대에 입학했고, 성인이 되었지만, 적어도 천주교 재단이 운영하는 고아원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까? 이 아이와 칼빈주의는 무슨 상관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이 아이의 상처 받고 망가진 영혼은 무슨 상관입니까? 이 아이가 납득할 수 있게 그리고 이해할 수 있게, 여러분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학습 받았기 때문에) 자랑하는 '기독교'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아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참된 신자가 될 수 있게, 기독교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다양한 인생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 수많은 인생들을 고려하면서 체계비판적으로 정통신학을 공부하셔야 합니다. 신학교 밖에는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별의 별 인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그 사람들입니다. 칭의니 성화니, 수프라니 인프라니, 제한 속죄니 무제한 속죄니, 리차드 멀러가 어떻고, 바빙크, 칼빈, 베자, 벌코프, 튜레틴은 뭐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런 모든 공부는, 다 위의 사항들을 포괄하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어떤 집단에든지 거기에 속한지가 오래되면, 외부인으로서의 감각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축구를 하든, 원양어선을 타든, 의사가 되든 어느 경우든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신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공부하다 보면, 신학적 논의와 그런 논의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깥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질지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이 얘기 도대체 왜 하고 있는 거지? 이 얘기 해서 뭐하지?'하는 감각이 희미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외부인으로서의 감각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외부와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자기 바깥의 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는 것 만큼 답답한 것은 없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도 경험을 통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변증적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변증적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납득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변증적으로 이야기할 줄 안다는 것은 외부인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며, 진솔하게 자신의 상태를 드러낼 줄 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외부와의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목사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치명적입니다. 또 사실 외부인으로서의 감각을 상실했다면, 이미 그 모든 지식들이 객관적 타당성을 결여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절대로 상아탑에 갇히면 안 됩니다. 신학자는 그럴 수도 있지만 목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다른 직업을 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집단에 속한지 오래 될 수록, 외부와의 접촉이 적을 수록, 나이가 들수록 이 감각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경향과 싸우셔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하기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외부인으로서의 감각을 늙어서도 유지하겠다고 다짐하십시오.
  넷째로 실제 목회 현장에서 여러분을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은, 신학교에서 목에 핏대를 올려가며 논의하고 토론하던 주제들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신학교에서는 바르트(Karl Barth)가 어쩌니, 자유주의가 어쩌니, 톰 라이트(N. T. Wright)가 어쩌니에 대해 학교 다니는 내내 배우게 되겠지만, 실제 목회현장에서는 권사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아침마다 폭행을 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집사님께 어떤 도움을 드려야 하는지, 교회에서는 경건해 보이시지만 집에 가면 가정 내의 폭군인 장로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같은 문제들로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함몰되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들을 쓸모 없는 것이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바로 윗 세대가 저질렀던 실수입니다. 이것을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로,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무언가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좀 힘을 빼셔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무언가를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삶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먹으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어떤 특정한 일들을 하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가지시면 안 됩니다. 주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당신의 교회에 무언가를 하시도록 길을 내어드리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의 시종을 드는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수시로 주님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당신의 교회에서 이루시도록 시종을 드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이 공부를 왜 하고 있는 거지'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석하게도(?) 오늘날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11 ~ 15세기와는 달리, 더 이상 빵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소명'과 '하나님의 뜻' 때문에도 수 없이 흔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분명히 합시다. 지금 그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과 대강 공부하는 것 중 어느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겠습니까? 당연히 전자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장래의 내 인생에 대해 무슨 계획이 있으신지 알려주신다면 그에 맞춰서 열심히 살텐데..'하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하님께서 그런 것들을 알려 주시는 경우는 드물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알고 싶어서 답답해 하지만, 이 답답함의 당부당(當不當)을 떠나, 최소한 지금 여러분이 해야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열심히 공부 하십시오. 그리고 그 다음 진학할 때나 학교문을 나설 즈음에 하나님께 좀 매달리며 여쭈어 보십시오. 그 때 즈음에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양들을 먹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추신1 : 추천할 만한 도서로는 ①『보수와 자유를 넘어 21세기 복음주의로』(로저 E. 올슨 지음), ②『기독교 변증』(알리스터 맥그라스 지음), ③『완전한 진리』(낸시 R. 피어시 지음), ④,『누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려워하는가』(제임스 K. A. 스미스 지음) ⑤『선택이란 무엇인가』(브루스 A. 웨어 외 4인 지음), ⑥『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김남준 지음)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의 글은 잘 안 읽는 경향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편협성이라는 것은 잘 모르기 때문에, 무지하기 때문에, 겁이 나기 때문에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배움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을 감추려하지 맙시다. 솔직하게 인정합시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합시다. 정통 신학이 진리라고 생각하신다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자신이 있으시다면, 다른 신학들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 하셔서는 안 됩니다. 다른 체계와의 접촉을 피하는 것은 자신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찾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입으로는 칼빈주의가 진리라고 그리고 진리는 스스로 싸워서 이긴다고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보수와 자유를 넘어 21세기 복음주의로』를 쓴 로저 올슨은 열렬한 알미니안입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열렬한' 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그리고 『선택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인프라(타락후선택설)인 브루스 웨어와 수프라(타락전선택설)인 로버트 레이먼드의 글만 읽지 마시고 나머지도 다 읽으시길 바랍니다.

추신2 : C. S. 루이스는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신학의 모든 부분을 통속어로 번역하셔야 합니다. …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사고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의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생각이라면 아직 정리되지 못한 생각이라고 저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번역할 수 있는 힘은 자기 말의 의미를 진정 이해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험대입니다. 어떤 신학 작품의 한 구절을 일상어로 번역하는 문제가 서품 자격 시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이 문제를 틀리면 시험 전체에서 탈락시켜야 합니다. 반투족에게 가는 선교사들은 반투어를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일반인들에게 가는 선교사들이 그들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추신3 : 역시 C. S. 루이스가 『피고석의 하나님』에서 한 말입니다. "대학같이 크고 말이 많은 사회에서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패거리를 이룰 위험이 상존합니다. 그렇게 되면 반대편의 입장을, 이런 저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식으로 무력화된 형태로만 접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자리에 없는 상대편 사람들의 입장은 손쉬운 반박의 대상이 되고, 안일한 독단론이 무성하게 되며, 자신들과 다른 의견은 집단적인 적대감과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각 집단은 다른 집단이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논증이 아니라 최악의 논증을 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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