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Ⅰ 본문
"학습 된 온갖 관점들로부터 벗어나 정직하게 의심하십시오. 그렇다면 당신은 신앙의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1. 학계 전반에 걸쳐 신에 대한 믿음은, 비이성적이고 미성숙한 욕구와 바람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반대로 회의주의나 무신론 등은 이성적이며, 사물과 현상에 대한 황당한 평가는 하지 않는다고 보는듯하다. [폴 비츠]
1-2.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의심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이미' 어떤 관점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 대해 의심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문제의식을 느끼는 그 대상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기준'에 견주어 보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지 상태에서는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문제의식은 그 이전에 어떤 기대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생긴다. 따라서 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을 느낀다면 내면에 이미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3-1. 우리가 대학을 통해 배운 언어에는 근대를 통해 형성된 일정한 세계관이 '이미' 깔려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세계관이 관계되어 있다. 첫째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자연밖에 없으므로 신이나 계시나 초자연적인 일은 없다고 보는 이른바 "자연주의"(naturalism)"다. 그리고 둘째는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이 아니라 우리의 약속이나 관습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는 "반실재론"(anti-realism)이다. 그리고 셋째는 모든 것을 인간의 경험과 판단을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인간주의"(humanism)이다. [『완전한 진리』, 강영안 서문, p.21]
1-3-2. 또한 어떤 대상을 그것보다 더 단순하고 하등한 것들만을 가지고서도 분석하고 설명해 낼 수 있다고 보는 환원주의(reductionism) 역시 대학을 통해 배운 언어들에 이미 깔려 있는 생각이다.
1-3-3. 자연주의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대상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관점이다.
1-3-4. 인간주의(humanism)는 세상을 설명할 때, 인간의 인식과 지각만큼은 우리 모두에게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논의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가장 정직한 방법이라고 보는 입장이기도 하다. 또한 이 입장은 인간과 세상은 자기 목적적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도 도덕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자기 목적적이라는 것은 인간과 세상이 자기 스스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인간주의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과 법칙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질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진실인 것으로 믿고, 그러한 유(類)의 설명이 나와야만 비로소 만족한다는 점이다.
1-3-5. 현대주의 역시 또 한 가지 전제다. 현대주의란 현대의 지식은 과거 지식의 토대 위에 있으므로, 현대인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과거인들 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지식을 알고 있고, 더 현명하게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이다.
1-4. 이와 같은 전제들의 결과로서 일반적으로 현대인은 하나님은 없고, 인간 보다 높은 권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이에 대한 수용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갈릴 뿐이다. ①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논리를 끝까지 몰고 가서 세상을 우중충하게 하지는 말자는 입장이 있다.② 또는 이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거나 멈추는 입장이 있다. ③ 또는 이 논리에 따른 결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신무신론자’들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없고 죽음이 끝이라면 무슨 짓이든 다 가능하다."
1-5. 불가지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 어느 경우에도 우리는 실체에 관한 진실을 알 수 없다고 보는 '확정적 불가지론'이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는 어느 한쪽으로 판단을 내리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잠정적으로 판단을 유보해 두겠다고 하는 '잠정적 불가지론'이다.
그런데 확정적 불가지론의 경우에는 '알 수 없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자기모순을 일으킨다. 따라서 확정적 불가지론은 타당하게 성립할 수 있는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성립할 수 있는 불가지론은 잠정적 불가지론뿐이다.
물론, 논리적으로는 어떻게 판단이 되기는 하지만 마음의 확신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하나의 인식론상의 입장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신 존재 문제에 대해서는, 무신론, 유신론, 종국에는 어느 한쪽으로 해소되어야 하는 불가지론이 존재한다.
1-6-1. 검토되어야 할 우리 세대의 관점 중 또 하나는, 이념헌신에 대한 부정적 태도다. 이러한 부정적 태도가 형성되게 된 주된 이유는 실용적 혹은 경험적 이유들 때문이다. ① 이념헌신적인 태도는 타인을 불쾌하게 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경향이 있으며, ② 가끔씩은 히틀러와 같이 전체주의로 흐른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악화가능성 혹은 악영향과 진리합치성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래도 현대인들은, 어떠한 종류의 삶은 옳은 반면 어떤 종류의 삶은 틀렸다고 말하는 그런 식의 논쟁은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적 기울어짐을 뒷받침 하는 이론적 배경으로서, 진리의 부존재론이 제시되어 왔다. 그러나 진리의 부존재론 역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1-6-2. 장님과 코끼리 이야기는 장님이 아닌 누군가의 관점에서 쓰인 것이다. 코끼리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든 장님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져보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다른 장님들과 같이 당신도 장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아무도 진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다른 이들보다는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 어떤 종교도 진리 전체를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당신이 다른 그 어떤 종교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그 영적 실재에 대해 우월하고도 포괄적인 지식을 갖는 것이다.
… 만일 "나는 어떤 종교가 진리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겸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아무도 진리를 알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교조적으로(dogmatically)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주장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이 된다. 철학 시간에 배웠겠지만 그것은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지는 꼴이다. [팀 켈러,『세상이 묻고 진리가 답하다』, pp.80 ~ 81]
1-7.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많은 무신론들을 ‘신무신론’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것은 사실 그 전 세대의 무신론에 비하면 수준이 낮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별다른 '설명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무신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음모론적 설명에 제시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신무신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문제가 없음을 확정하고 넘어가야할 필요를 그 이론들이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을 것인데,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그렇게 믿지 않은 채로 살아가려 할 때 불안해하는 양심(conscience)과 의식(consciousness)을 달래줄 스콜라틱(Scholarstic)한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살아가던 대로 살아가도 된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해주는 신뢰할 만한 설명 제공과 위로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에 대해 '아닌데?,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라고 반응할 수도 있으나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음모론적 설명이다. 무신론자들이 논리 바깥의 설명을 끌어와서 유신론 논증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 한 것처럼(실제로 지난 200년 간 그렇게 해왔다), 이와 같은 설명에 의해 무신론 논증 역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평가절하 될 수 있다. 보통의 사람은 음모론적 해석이나 감정이입적 해석, 인격적 해석, 인지상정적 해석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유신론에 대한 포이에르 바하의 투사이론이 대표적으로 그런 것이다. 포이에르 바하의 투사이론은, 우리가 신을 믿는 것은 우리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의지할 무엇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설명’이지 ‘논증’은 아니다.
1-8. 프로이트는 인간의 가장 오랜 심리적 요구 중 하나가 바로 사랑받고 보호받고 싶어하는 욕구라고 했다. 그러서 어느 면으로 보나 든든한 아버지나 신적인 보살핌을 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납득하기 쉽지 않은데, 아버지라는 개념을 가진 종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지중해 지역의 기독교 이전의 종교나, 유대교 이전의 종교들이 그렇다. 어떤 주요 종교들은 신의 개념을 아예 갖지 않거나, 신에 대한 이해도 기독교와 사뭇 다르다.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욕구가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나 유대교의 믿음을 설명하는 데는 어느 정도 부합할지는 몰라도 보편적인 욕구라고 가정하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것이 보편적인 욕구라면 모든 종교가 같은 개념의 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오히려 프로이트의 이론은 역으로 왜 사람들이 ‘기독교의 신’을 믿지 않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대로 그것은 아버지와 기독교의 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많은 열렬한 무신론자들의 삶을 연구해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폴 비츠]
1-9.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았을 때 신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한 때 무신론자였던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무신론자이던 시절 나에게 이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신이 있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새는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생각이나, '내 감정으로 쉽게 납득할 수 있을만하게 세상이 돌아갔어야 한다'라는 생각은 이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가봅시다. 만약 이 온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있다고 치고, 그 신의 행동 방식이 다음의 두 가지 중 딱 하나이어야만 한다면 그 신은 어떤 쪽일까요? 그 신의 행동방식은 우리가 모두 이해하고 납득할 만한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을만한 것일까요? 당연히 후자입니다. 만약 전자라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아마도 1만 미터 깊이의 해양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기이함이나, 150억 광년 우주의 광대함이 실제로 얼마만큼 인지에 대해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 신이 전자와 같이 그렇게 '쉬운' 존재라면, 그 신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거나 우리의 감정이 그것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점은 우리 '합리적인' 무신론자들의 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인간의 눈에 불합리해 보인다거나 불공평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은 신이 존재한다는 논증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내가 무신론자이던 시절 이점은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존재하는' 신이 맘에 들지 않다거나 싫은 것뿐이지,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뿐입니다. ①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나는 그 신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②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내 맘에 들지 않아도 불평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의 반감은 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하는' 신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반감을 갖지 말든지 신이 존재한다고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해야 합니다."
1-10. 기독교 신앙에 대해 공정하게 생각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장애를 유발하고 있는 또 한 가지 사항이 있다. 그것은 교회와 교인이다. 이것은 충분히 타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또 다른 무신론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교회와 그곳에 출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충분히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신앙이 진리인지 여부를 가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문제지 신의 문제는 아니지 않습니까? 만약 신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의 부패가 그 신의 부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내가 무신론을 고수하는 것은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물론, 순전히 감정적으로 '그래서 나는 그 집단이 내키지 않으니 그들이 하는 말도 내키지 않고 그 집단에 속하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히 수긍할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러한 감정이 든다는 사실이 신의 부존재를 증명하거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1-11. "인간 지식은 끊임없이 성장하는데 기독교의 교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주 들을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비난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미 작아져 버린 틀에 새로운 지식을 억지로 구겨 넣는 가망 없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로 봅니다. 저는 이런저런 교리와 과학 이론의 구체적인 불일치보다 이런 인상이 외부인들이 기독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데에 더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리와 과학 이론 사이의 개별적인 '난점들'을 수십 가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 전체가 억지에 불과하다는 불신자들의 거부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해결책이 기발할수록 더욱 억지스럽게 보입니다. 불신자들은, 우리 선조들이 지금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아는 바를 알았더라면 기독교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믿고 있고, 불변함을 내세우는 모든 사고 체계는 지금 아무리 꿰매고 고쳐 봐야 결국 지식의 성장에 적응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피고석의 하나님』, p.34]
2-1. 본격적이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어떤 사항에 대한 설명 A와 설명 B가 양립불가능하다면, A를 참이라고 믿을 경우, 우리는 동시에 B는 거짓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2-2. 또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몇 가지 분명히 하고 넘어갈 것이 있다. ① 첫째는, 이하에서 이야기하는 '신'이란, 의도와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격적인 존재로서,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라는 뜻이라는 점이고, ② 둘째는, 기독교적 관점에 따르면 신의 존재를 믿는 것으로는 이른바 '구원'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한참 나중에 자세히 다룰 계획이므로 대충 넘어가도 좋다.) ③ 셋째는, 온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우주에는 선과 악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까지는 인간의 지성만으로도 미루어 알 수 있지만, 인간의 지성만으로는 기독교의 주장과 같이 ⅰ) 모든 인간이 심각한 죄인이라는 사실이나 ⅱ) 그 죄를 용서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나 ⅲ)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지방에 태어나 십자가에서 처형된 이스라엘의 한 목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사실까지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 역시 나중에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2-3. 진화론과의 대립에 있어서 유대-기독교가 반대하여 주장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① 최초의 생물체는 무생물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②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생물종의 다양성은 어떤 최초의 ‘하나의’ 생물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유대-기독교는 생물의 진화가 현재 진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나, 현재 발생할 수도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양성을 갖춘 생명체들이 존재했지만 그 후에도 계속된 진화로 생명체가 더 더욱 다양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유대-기독교는 반대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반대하는 것은 수십 억 년 전에 자기 생식 능력을 갖는 생명체가 무생물로부터 발생해서, 그로부터 생식과 진화를 거듭한 결과 오늘날과 같은 생물종의 다양성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반대로 유대-기독교가 적극적으로(positively) 주장하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다. ① 생물체를 비롯한 온 우주는 탁월한 지성을 가진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② 세상에는 그 신이 제정(制定)한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 존재한다.
2-4. 그리고 또 한 가지 밝혀야 할 것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변증적 혹은 담화적 작업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이것들을 모두 수긍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다. 기독교는 전인격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접 충분한 시간을 갖고 숙고해 보고 씨름해 보아야 한다. 단순한 지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고 온 마음으로 끌어안을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Ⅰ’이다.
3. 세계관은 실재를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어떤 것들은 종교적이고 또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불교, 실존주의, 이슬람, 무신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이 모든 것들 중 어느 하나도 옳다고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것들은 세계에 관여하는 '큰 그림'의 방식으로서 역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근본적 신념은 궁극적으로 확정적인 증명 너머에 놓여 있다.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모든 세계관들은 결국 '신념 체계'의 범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증명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의 본질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도킨스의 망상』(Dawkins Delusion?)의 표현을 내가 고쳤음]
3-1. 세계관 내지 관점(이하 '세계관'이라 함)은 존재하는 여러 현상과 사실들을 설명하는 일관된 틀이다. 그리고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세계관의 타당성은 귀추법을 통해 판단이 된다. 귀추법이란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즉, 가장 좋은 설명 쪽으로의 추론을 말한다.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이론이나 가설들 중 어느 것이 우리의 경험과 가장 잘 들어맞는지를 따져보는 방식으로 그 타당성을 판단하는 방식이다.
세계관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일에 있어서 귀추법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세계관들 자체가 이 세계의 바깥에서 사실들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등장한 것일 뿐더러, 주어진 사실들이 논리 필연적으로 어느 하나의 세계관만을 지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세계관의 타당성은 주어진 사실들과 현상들에 대한 "설명력"에 의해 판가름이 난다. 어떤 세계관이 더 설명력이 좋은지로 판가름이 난다.
문제는 이 설명력이 꽤 미묘한 것이라는 점이다. 주어진 사실들이 모두 10개라고 했을 때, 대립하는 세계관들 모두는 이 모든 10개의 사실들을 간단한 설명으로 풀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한 세계관이 주어진 10개의 사실 모두를 명쾌하게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세계관은 그 논쟁에서 '이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지 못하다(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등에서 온갖 관점들의 대립을 생각해보라). 그래서 대립이 생긴다. 대립하는 각각의 세계관들은, 무언가 자신의 관점으로 설명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주어진 10개의 사실들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실은 중요한 반면 어떤 사실은 부차적이다. 여기에 더더욱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논쟁이 판가름 나지 않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라고 여기는 사실이 개개인 마다 꽤 다르다는 것이다.
A관점과 B관점이 대립하고 있다고 해보자. 이 때 어떤 사람은 10개의 사실 중 세 번째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일곱 번째 사실을 설명하는 데는 다소간의 난점이 있지만, 세 번째 사실을 명쾌하고 단순하게 풀어내는 A관점에 의해 '설득되는' 반면, 또 다른 사람은 10개의 사실 중 일곱 번째 사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서, 세 번째 사실을 설명하는 데는 다소간의 난점이 있지만, 일곱 번째 사실을 명쾌하고 단순하게 풀어내는 B관점에 의해 '설득 된다'. 단순히 이성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감정의 문제가 포함된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A관점에 안착하는 반면, 어떤 사람의 마음은 A관점에는 정을 붙이지 못하고 B관점에 안착한다.
3-2. 자연과학은 수학적 증명과 같은 연역법이 아니라, 귀추법이라 부르는 추론을 통해 진행된다. 귀추법은 '가추법' 또는 '가설연역법' 또는 '가장 좋은 설명쪽으로의 추론' 등으로 불린다.
귀추법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이나 사실들을 관찰한 후에 이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설명'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어떤 사건이나 현상의 배후에 있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추론하는 과정 중 하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혹은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어 보는 과정이다. 즉, 귀추법은 사실을 연구하고 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론을 고안해나가는 과정이다.
귀추법 개념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3가지 추론의 형태를 제시했다. 즉, 연역법(deduction), 귀납법(induction), 그리고 후에 미국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가 귀추법(abduction)이라고 부른 추론 형태가 그것이다.
연역법이 필연의 논리 규칙에 따르는 어떤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귀납법이 높은 개연성을 갖는 어떤 것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귀추법은 어떤 것은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귀추법의 추론과정은 다음과 같다. ① 어떠한 놀랄 만한 현상 P가 관찰된다. ② 만일 이에 관한 가설 H가 참이라면, H는 P를 설명하지 못하면 안 된다. ③ 그런데 가설 H는 P를 설명한다. ④ 따라서 가설 H가 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가 존재하게 된다.
귀추법(歸推法, Abduction)은 여러 설명 중 하나를 선택하는 추론의 한 방법으로써, 만약 어떤 설명이 참이라면 관계있는 증거를 가장 잘 설명할 것 같은 설명을 선택하는 방법이다. 귀추법에 의한 논증은 주어진 사실들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그럴듯한 혹은 최선의 설명을 추론한다.
3-3. 무신론과의 대립 문제가 세계관의 문제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과학적 탐구에 근거한 것이든 아니든) 어떤 무신론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신이든 우월한 정신이든 그것이 존재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만들려면,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들 중 앞으로 어떤 일이 추가적으로 더 발생해야 합니까? 또 과거에 어떤 일이 추가적으로 더 일어났어야 합니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다. "없습니다. 그렇게 보기 위해 추가적으로 더 필요한 사실이나 사건은 없습니다."
그렇다. 유신론, 무신론 문제는 어떤 한쪽의 주장을 단정적으로 지지하는 증거가 존재하는 경우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하는 증거들을 설명하는 여러 체계 중 어떤 것이 더 타당한지를 판별하여 선택하는 문제다.
3-4. C. S. 루이스는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을 수용하는 것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4. 어떤 개인이 진실로 공정하다면 자신의 세계관이 다른 세계관들과의 설명력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인지를 시험해 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 무신론자였던 C. S. 루이스(Lewis)는 그의 책에서 "무릇 건전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려는 젊은이는 독서 생활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공정하게 무신론자의 책과 유신론자의 책을 두루 읽는다면, 무신론적 세계관만을 고수하고 있기는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 한 것이다.
4-1. 특정 신앙을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다른 쪽의 신앙을 참되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필립 존슨]
4-2. 결국 우리는 아무 세계관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여러 세계관 중 하나인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일 것인지 여부는, 종래 자기의 세계관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세계관을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나, 마르크스주의, 진화론적 무신론 등 경합하는(konkurenz) 어떤 하나의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동시에 그것과는 양립불가능한 어떤 하나의 세계관을 긍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 외에 다른 세계관을 긍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자기 세계관의 틀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한 기독교는 항상 어리석은 모순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자기의 세계관 안에 집어넣고 해석하는 한 십중팔구 하나님은 어리석은 것이 될 것이다. 이미 양립불가능한 다른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5.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지적(intellectual)' 저항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가부터 시작해서, 성경은 오늘날 발전된 자연과학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오류임이 판명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순진하고 선량하기만 한 우리 누나가 그토록 일찍 죽어야 했는가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 존재하는 지적인 걸림돌들이 있다. 자신이 판단하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기독교가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이 사실(truth)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정서적(emotional)' 장애물 때문이다. 기독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종교나 사상은 거짓이라는 기독교의 배타성,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예외 없이 모두 지옥에 간다는 교리, 그리고 중요하게는, 기독교인들의 위선과 부도덕이야말로 거의 모든 이들에게 정서적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교회 안에 존재하는 위선과 부도덕이야말로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내쫓는 가장 큰 요인이다. 어떤 이는 기독교에서 가장 큰 골칫덩어리는 정작 기독교 신자라고 말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는, '의지적인(volitional)' 이유 때문이다. 기독교의 윤리가 삶에서 우리의 자유를 다분히 제약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우리의 자유를 무조건적으로 굴복시키는 일은 천성적으로 대부분이 내켜하지 않는 일이다. [노먼 가이슬러 · 프랭크 튜렉,『진리의 기독교』, pp.43 ~ 44의 표현을 내가 많이 고첬음]
5-1.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이런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5-2. 참으로 인간은 만족시키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경찰이 용의자를 대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대합니다. 그가 한 모든 일을 '그에 대한 불리한 증거'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의 사악함 때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에는 우리의 존재 방식과는 상관없이 '존재' 자체에 늘 당황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한하고 우발적인 존재, 즉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인 인간은 자신이 지금 여기에 사물의 실제 질서 위에 놓여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어려운 모양입니다. [C. S. 루이스,『피고석의 하나님』, p.37]
5-3.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 문제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더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상, 이념, 사물, 사람에 대하여 우리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경우가 많고, 또 그래도 무방한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류에 속하지 않는 것들 중 하나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이것에 대해 양자택일 이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적극적인 긍정 외의 태도는 모두 거부로 간주되어 육체의 사망 이후에 지옥불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모든 반응은 결국 ‘좆 까’라고 반응한 것이거나, ‘헐.. 그럼 어떡하지’라고 반응한 것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정말 그렇다. 이 둘 외의 다른 반응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질문은 회피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전자로 분류된다. 왜냐면 어떤 식으로든 좌우간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전자에 속한다고 이미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질문을 회피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류의 모든 '사상헌신적인 태도'에 대해 우리 세대는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가 모두 이러한 사상 헌신적 태도의 결과로서 전쟁과 갈등 살육과 폭력의 연속이었음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세대는 아이스크림, 동물, 영화, 게임, 장난감, 옷, 신발에 몸과 마음을 헌신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성경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6-1. 사람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인생과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갖기 시작한다. 다소 공정하게 세계와 세상을 판단하려는 사람도 간혹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충분한 검토를 거치기 전에 어떤 입장을 좋아하게 된다.
6-2. 어떤 주장 내지 명제를 증명하는 것과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크게 다르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일은 오직 각 사람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아직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당신이 마음을 열어 놓고 있는지 알기 위해 다음 질문을 진지하게 다뤄보기 바란다. 만일 기독교에 관해 품고 있던 심대한 의문과 반대견해에 대해, 누군가 합리적 해답을 제시하게 된다면 즉,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 타당하게 기독교가 진리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에까지 다다르게 한다면, 당신은 기꺼이 기독교인이 될 마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잠시만 생각해 보라. 당신의 솔직한 대답이 '아니오'라면, 당신이 기독교에 대해 갖고 있는 저항감은 단순히 지적인 데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의지적인 데서도 오는 것이 분명하다. 증거를 가져다 놓았다고 가정했는데도 당신이 기독교를 진리로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 자체도 장애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진실로 기독교를 지지하는 증거들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어 놓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당신만이 알고 있다. [노먼 가이슬러 · 프랭크 튜렉,『진리의 기독교』, pp.56 ~ 57의 표현을 내가 많이 고쳤음]
6-3. 현대인들은 유난히 '이성'과 '이성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믿음과 이성을 대비시킨 후에, 믿음을 비(非)이성'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것은 타당한 판단이 아니다. 예컨대, 초등학교 수학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파이(π)값은 무리수로서 소수 뒷자리는 무한히 계속된다고 가르쳤다고 해보자. 이 때 한 아이가 파이 값의 소수 뒷자리가 정말 '무한히' 계속되는지에 대해 직접 계산해본 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을 '믿었다'. 이 아이의 믿음은 비이성'적'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아이를 비이성적이라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선생님의 말을 믿지 않은 아이가 비이성적일 가능성이 있다. 그 지식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믿음'을 사용하지 않은 아이가 비이성적일지 모른다. 믿음은 이성이 아니지만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에 있어서 믿음을 사용하는 것이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다.
6-4. 역사적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있어서, 그것을 위한 도구로서, ① 이성, ② 경험, ③ 권위, ④ 역사(歷史)가 사용되어 왔다. 이 네 가지 모두가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문제는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로서 이성 자체만을 사용하려 한다는 데 있다. 이성주의에 함몰되어, 정작 이 모두를 사용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성'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신앙은 종종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야기를 하곤 하지만, 그것이 신앙과 이성의 충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6-5. 옛날 사람들이 편견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편견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생각이다. 적어도 나이가 들어 고전을 직접 읽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했던 생각이나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생각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충격적인 것은 서기 4세기 사람들의 생각이, 지금 우리가 하는 생각들과 너무 비슷하다는 점 때문이다.
6-6. 현대인들 중에는, 전통사회의 구성원들은 권위에 저항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실제 역사를 공부하지 않고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채색된 역사를 학습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7. 신 존재 문제에 대해, 현재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과 공간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보려 할 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째서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며 우리의 일상 관념을 뛰어넘는 수많은 법칙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 먼저 답 해보는 것이 좋다. 말하자면 신은 없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물질이 전부라면, 왜 하필 자연계는 무질서가 아닌 '법칙(法則)'을 따라 운동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 할 만한 질문은 철학적인 것인데, 우리와 이 세계는 왜 하필 없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없지 않고 하필 있는가?"
6-8. 자연으로부터 신의 위대함을 추론하는 논증을 미신적이거나 원시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은, 이미 계몽주의로부터 학습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전제들에 대해 공정하고 무색적(無色的)인 마음으로, 그것이 정말 그런지, 과연 그런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요구된다.
6-9. 새가 낳은 알은,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 칼슘(Ca)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온기를 가해주고, 또 다른 비타민과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을 공급해주면, 이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칼슘의 결합체는 공중을 날아다니고, 소리를 내게 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 생명력이다. (물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형상’(forma)라 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영원토록 스스로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의 바깥에서 온 것일까? 이 두 가지 가능성 외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6-10. 진화론이 처음 등장하였을 때, 당시의 지식인들은 그것에 대해 저마다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소위 '전문화'라고 하는 막연한 장막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진화론이 처음 등장하던 시절의 지식인들은 이것이 자연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철학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현대의 지식인들은 전문화의 장막에 가려서 이것이 철학의 문제임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지식인들은 충분한 근거가 존재하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전문 영역과 관련된 것 같은 경우에는 선뜻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고 넘어 갑시다. 진화론은 철학입니다. 더 많은 과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진 결과, 그 자료들이 논리 필연적으로 어떤 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도달하게 된 입장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창조론이 내어놓는 근거자료들은 진화론으로도 모두 설명될 수 있고, 역으로 진화론이 내어놓는 근거자료들 역시 창조론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과학의 문제로 보입니까?
6-11. 진화론자들은 어떤 생물이 특정 환경에 적응한 몇 가지 사례가 있음을 근거로, 과감하게도 생물이 오랜 시간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반복될 경우, 아예 다음 세대에는 종(種)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논증을 펴면서도, 지적설계론자들이, '이러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유치한 논증을 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적 설계론을 오해한 것이고, 자기들 스스로의 견해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지적 설계론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함은, 지적 설계론이 논리적 방법으로서 '귀추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고, 스스로의 견해 즉 진화론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고 함은, 스스로의 견해가 논리적으로 꼼꼼하게 지지되기에는 증거가 얼마나 턱없이 부족한지를 알지 못할 뿐더러, 자신들 역시 귀추법에 근거한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7. 만일 태양계가 우발적인 충돌로 발생했다면, 유기체로서의 생명도 지구상에 역시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되고, 인간의 전체적인 진화 역시 우연에 불과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품은 모든 생각들도 원자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부산물로서 우연적인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물론자들과 천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단지 우연적인 산물이라고 한다면, 왜 우리는 그들의 생각이 참되다고 여겨야만 하는가? 하나의 우연이 다른 모든 우연에 대해 올바른 설명을 제공한다는 그런 사상을 믿도록 하는 근거를 나로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 [ C.S. 루이스,『God in the Dock』]
7-1. 신 존재 문제를 다루는 논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를 긍정하는 측이나 부정하는 측 모두 자신의 논증이 타당함을 주장하는 방식으로서, ‘설명력’에 호소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논증에 대해, ‘신이 없어도 그것은 설명될 수 있잖아?'라고 반박하거나,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증에 대해 ‘신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잖아?'라고 반박하는 것은 논지를 잘못 파악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꼭 신이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거나 '그렇다고 해서 꼭 신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는 반박도 마찬가지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 신의 존재 여부가 결정적으로(decisively)는 판명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설명이 이 세계를 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는가이다. 여러 세계관 중 꼭 하나와만 부합할 수 있고 다른 세계관과는 부합할 수 없는 그런 식의 증거는 찾기 어려워 보인다. 모든 세계관은 어떤 식으로든 모든 사실을 설명할 것이다. 물론 그것이 어색한지 자연스러운지는 별개다.
7-2. 자연계가 개념적으로 융통성이 있다(conceptually malleable)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계를 무신론적인 방식으로 ‘읽거나' ‘해석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연계가 더 이상 자연계의 사건들에 관여하지 않는 신적인 창조자를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하며 자연계를 이신론적인 방식으로 ‘읽는다'. 신은 시계의 태엽을 감고 나서 시계 스스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신을 믿으며 더 특정하게는 기독교적인 관점을 취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더 막연하게 어떤 ‘생의 기운'(life force)을 말하며 더 초자연적으로 해석하는 견해(more spiritualized view)를 취한다.
논점은 단순하다. 자연계는 많은 정당한 해석들에 열려 있다는 것이다. 자연은 무신론적, 이신론적, 그리고 유신론적 그리고 다른 많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반드시 이것들 중 어떤 하나로만 해석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대한 어떤 특정한 종교적, 영적 혹은 반종교적 관점에 전적으로 마음을 두지 않고서도 ‘진정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
… 첨언하자면, 이것은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내가 이야기를 해 본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견해이다. 교조주의적인 무신론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왜 자신의 동료들 중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지 완벽하게 잘 이해할 수 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 『도킨스의 망상』(Dawkins Delusion?)]
7-3. 도킨스는 무신론자인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마이클 루즈]
7-4. 오감을 통한 연구가 불가능한 대상에 대해서는 과학 법칙을 사용하여 그것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오류를 입증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를 다룰 때 던져야 할 질문은, ‘신을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볼 만한 증거가 충분한가'라는 것이다.
신에 대한 우주론적 논증은 ‘세계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기초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과율이다. 즉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우주에는 시작이 있었다. 따라서 우주의 시작이라는 결과의 원인이 될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즉 우주는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이 생각을 끝까지 확장시켜 보면, (우주의 시작을 야기한 원인의 또 다른 원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은 외적 원인에 의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창조주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 우주의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다고 말하는 열역학 제2법칙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에너지가 고갈되고 있다는 것은 우주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며, 또한 과거의 어느 순간에는 우주의 시작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지금 현재 무언가가 서서히 풀리고 있다면, 과거에는 그것이 완전히 말려 올라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결정적으로 ‘빅뱅'이 발견됨으로써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우주가 영원하다는 이론은 격파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과학자들의 평가이기는 하다.)
그렇다면 우주는 언젠가 한 때는 없었지만 현재는 있는 것이 된다. 그리고 자연법칙상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는 없기 때문에, 우주는 스스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이 다음에는 자연스레 신학적 질문들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그 빽빽한 물질 덩어리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누가 그것을 폭발시켰는가? 유명한 물리학자 앨런 구스(Alan Guth)가 지적한 것처럼 설사 물리법칙을 통해 무에서 유로의 창조를 설명하는 이론이 세워진다 해도, 여전히 또 다시 그 물리법칙의 기원을 설명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이렇게 되면 ‘창조주에 의한 창조' 개념은 과학에서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한 또 하나의 논증은 '목적론적(telelogical) 논증'으로 이 논증의 핵심은 이 복잡한 우주의 설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있다.
사막 한복판에서 우주왕복선을 발견했다고 치자. 우리는 이 우주선이 풍화작용에 의해 우연히 합체되어 만들어졌다고 추론할 수도 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모래 바람을 따라 금속들이 어디선가 튀어나오고 자연의 기이한 우연의 결과로 기구들과 금속판, 날개가 합쳐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상황을 보고 생각해 내는 것이 이런 추론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사막에서 우주왕복선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우리 머릿속에는 '누군가가 그것을 만들어' 그곳까지 타고 온 것일 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이 추론은 우주뿐 아니라 신비로운 인간의 신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의 몸은 매우 정교한 질서로 구성된 조칙체로, 이런 인간의 몸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발생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다. … 이것은 마치 윈도우7이 컴퓨터 창고의 폭발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개연성이 떨어지는 주장을 믿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이 주장에 매료되어 있다.)
우리 몸의 설계와 우주에 존재하는 복잡한 상호 연관성은 설계자의 존재를 나타내는 증거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혼돈 속에 시간과 우연이 더하여져 믿기 어려울 정도의 질서를 갖춘 우주와 근사하게 설계된 생명체가 만들어 졌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기하게도 인류와 탄소로 이루어진 생물 즉, 과학이 인식할 수 있는 생물 형태에 보기 드물게 매우 적합한 장소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미세조정 논증이라 한다.
다음으로 ‘인간의 인간성'(humanness of humans) 논증이 있다. 이 논증의 핵심은 ‘인간의 특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인간의 특성인 영혼이 원시의 점액 웅덩이에서 진화되어 나왔다는 설명은 믿기 힘든 주장이다. 팔과 다리, 허파라면 모르겠지만 나를 ‘나답게'만드는 그것도 이런 식으로 형성될 수 있을까? 그리고 또 ‘생각'이라는 것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우리는 어떻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성찰하며 느끼고 추론할 수 있는 것일까?
인류학자들은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영적인 존재들로서, 모두가 신의 개념에 호기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C. S. 루이스(Lewis)는 인간의 욕구는 세계의 실재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식욕이 생긴다는 것은 그 필요를 충족시킬 '음식'이라는 것이 이 세계 어딘가에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신이 없다면 신을 갈망하는 욕구가 우리에게 없어야 했을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바람과 욕망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려한 사람도 있었다. 정신분석학파의 아버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그중 한 사람이다. 이 주장의 딜레마는 완전한 것을 찾는 인간 욕구의 보편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또 도덕적 논증은 인간이 타인과 세계를 다룰 때 옳고 그름에 대한 직관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두 아들을 둔 어떤 어머니가, 한 사람이 한 개씩 먹으라는 쪽지를 과자 두개와 함께 식탁에 남겨 두었다고 해보자. 그 중 한 아들이 과자 두 개를 모두 먹어 치울 경우, 그 어머니는 복잡한 도덕적 논증을 한 바 없지만 그 과자를 먹을 때 그 아들은 자기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문자의 형태로 명료하게는 아니더라도) 알 수 있다.
또 복잡한 극장에서 누군가가 내가 먼저 앉았던 자리에 앉으면 우리는 그에게 다가가 "거긴 제 자리입니다. 제가 먼저 거기에 앉아 있었거든요!"라고 말할 것이다. 직접 말을 내뱉지는 못한다 해도 적어도 이와 비슷한 생각은 할 것이다. 각기 다른 문명과 문화들의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은 놀라울 정도의 일관성을 보인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인도, 중국, 그리스, 로마의 도덕적 가르침을 조사한 C. S. 루이스는, 이 지역들의 도덕적 유사성이 놀라울 정도라고 지적했다. 이기심을 긍정적으로 칭찬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으며 충성심은 어디서든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문화에 따라 아내가 한 명인 곳도, 네 명인 곳도 있었지만, 마음에 든다고 아무 여성이나 다 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역은 없었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 S. 루이스는 그 이유를 탐구하면서 "직선이 뭔지 모른다면 인간은 그 선이 비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선천적인 도덕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인간 안에 이것을 심어 둔 신적 존재가 아니고서는 그 출처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 『신은 존재하는가?』, pp. 6 ~ 22 표현을 내가 많이 고쳤음]
7-5.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를 살피고 그 구조를 꼼꼼히 따져볼수록, 어떤 의미에서 우주는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다는 증거를 더욱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자연법칙은 우주가 생명의 발생과 보존을 향해 나아가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듯하다. … 미세 조정은 신의 설계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자연의 작용 중에서 매우 운이 좋아야 나타날 수 있으면서도 전적으로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 측면들이 있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을 특별히 지지하는 증거로 볼 수 있다. ① 특수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전자기력 같은 힘은 한 가지 체계의 진행 방향에 대해 직각으로 가해지든 그렇지 않든 똑같은 영향을 끼친다. 이것은 유전암호들이 작동하고 행성들이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② 양자법칙들은 전자가 원자핵 속으로 끌려들어가지 않게 막는다. ③ 전자기력은 한 가지 단위의 힘인데 이것 때문에 많은 과정들이 가능해진다. 이것 때문에 별이 수십억 년씩 꾸준히 타오를 수 있고, 이것 때문에 별 안에서 탄소 합성이 가능해진다. 이것 때문에 렙톤이 쿼크를 대체하지 못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원자는 만들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양성자가 너무 빨리 붕괴하거나 서로를 너무 강하게 밀어내지 않게 되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화학작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과정들 하나하나가 다른 크기의 힘을 필요로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가지 크기의 힘이 이토록 많은 요구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앤터니 플루,『존재하는 신』, pp. 124 ~ 125]
7-6.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 행성의 움직임을 점점 정확히 예측하게 되자, 천문학자들은 어떻게 우주가 수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데 몰두하기 시작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과 일정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행성과 위성의 모든 면을 관장하는 법칙이 동일한 자연법칙임을 입증한 것은 아이작 뉴턴이 이룬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뉴턴이 행성과 위성과 사과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법칙을 설명한 것은 당시 인간 지성이 성취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물리학과 우주론 같은 학문을 통해 우리는 우주가 놀랄 만큼 질서정연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주가 얼마나 질서정연한지 수학으로 정확하고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다. 우주의 심층을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주 자체 그리고 우주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이 우주의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주의 합리성과 우리의 합리성이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학은 분명 인간의 이성이 자유롭게 만든 학문인데, 우주의 구조와 질서가 수학적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이를 바라본다면, 이것은 창조된 인간의 이성과 창조주의 패턴이 서로 공명(共鳴)하기 때문이다. [앨리스터 맥그래스,『하나님의 얼굴을 엿보다(Glimpsing the Face of God)』]
7-6-1. 우리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성적 추론이 이 세계의 실제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 둘 사이에 상통해야 할 하등의 자연적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7-6-2.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숙하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언제나 이 사실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우주가 질서 있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무질서한 혼돈(Chaos)이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또는 우주가 인간이 범접하지 못할 합리성을 가졌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리의 지성과 우주 사이에, 안으로 표현된 합리성과 밖으로 관찰되는 합리성 사이에는 어떤 일치가 존재한다. [존 폴킹혼]
7-6-3. 우주는 합리적으로 투명할 뿐 아니라 합리적으로 아릅답고, 우아한 수학공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기까지 한다. … 자연과학과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유사점 중 하나는 규칙성과 이해가능성이 이 세상의 특징이라는 근본적인 확신이다. …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주를 그렇게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주의 합리적 명료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왜 우리 마음 속의 합리성과 세상에서 보는 합리성이 깊은 조화를 이루는가? 수학은 인간 지성의 자유로운 산물인데, 왜 순전한 수학의 추상적 구조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그토록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가? 왜 수학은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토록 말도안되게 효율적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기독교 변증』, pp.173 ~ 174]
7-7. 옥스퍼드의 철학자 존 포스터(John Foster)는 그의 책 《신적 입법자(The Divine Lawmaker: Lectures on Induction, Laws of Nature and the Existence of God)》에서 자연의 규칙성은 신의 지성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법칙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규칙성을 우주에 부여한 무엇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주체가 이런 규칙성을 부여했을까? 포스터는 유신론적 대안이 규칙성의 원천으로 고려할 만한 유일한 제안이므로 세계에 규칙성다운 규칙성을 부과함으로써 법칙을 창조한 존재가 유신론자들이 말하는 신이라는 결론이 합리적으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앤터니 플루,『존재하는 신』, pp.119 ~ 120]
7-8. … 따라서 모든 지식은 추론의 유효성에 의존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원론적으로 "A가 B이기 때문에 C는 D일 것이다'라고 말할 때 느끼는 확신이 환상이라면, 그러니까 그 확신이 대뇌피질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 줄 뿐 외부의 실재가 정말로 어떠한지는 알려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 다시 말해 사고의 법칙은 사물의 법칙이기도 한 것입니다. 공간적 · 시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있는 사물들 사이에도 통하는 법칙 말입니다.
… 요컨대 궁극적 실재가 도덕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실재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없습니다. 실재가 허무하다는 우리 자신의 비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실재가 궁극적으로는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그 비난에 함축된 의미에 더 매달리게 됩니다.
무자비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우주에 쏟아내는 선한 무신론자의 저항은, 사실상 우주의 이면에 있는 무엇, 그가 무한히 가치 있고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무엇에 대한 무의식적인 존경의 표시입니다. 만약 자비와 정의가 정말로 개인이 부리는 변덕에 불과할 뿐 아무런 객관성도 없고 인간 외적인 것에서 비롯되지도 않으며, 그 무신론자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는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자비와 정의를 무시한다고 하늘을 비난하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생각 어딘가에는 자비와 정의가 더 높은 하늘에 좌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입니다. [C. S. 루이스,『기독교적 숙고』, pp.116 ~ 117, 128]
7-9. 살아 있는 모든 유기체들은 세 가지의 놀라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유기체들은 자립적이다. 이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지닌다는 뜻이다. 둘째로, 유기체들은 자기수복(self-repairing)능력이 있다. 상처를 입으면 그들에게는 치료할 방식이 있다. 피로해지면 휴식을 취해 생기를 회복한다. 셋째는 자기증식 능력이다. 이 세 가지는 생명 자체의 고유한 특질들이다.
자립적이고, 자기수복 능력이 있으며 자기증식을 하는 기계를 만든다고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 보라. 그런 기계는 현재 이론상으로만 존재한다. 이 이론상의 기계는 20세기 초, 헝가리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존 폰 노이만의 이름을 따서 "폰 노이만 기계"라고 불린다. 폰 노이만은 자립적이고, 자기수복을 하며, 스스로 재생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설을 세웠다. 인공 지능에 대한 현대적인 연구는 아직도 폰 노이만의 업적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현대의 컴퓨터들도 그의 혁신적인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과학은 진정으로 자립적이고 자기수복 능력이 있으며 자기증식을 하는 기계를 아직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능력을 가진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데 부딪치는 난점과 복잡성은 현대 과학으로는 여전히 해결 할 수 없다.
괄목할만 하게도, 살아 있는 모든 단세포들은 이런 능력을 지녔다. [존 맥아더,『우주와 인간의 시작』(The Battle for the Beginning) 中]
7-10. 데이비드 콘웨이는 생명을 유지하는 우주의 질서가 어떤 형태의 지성의 설계물도 아니라는 흄(David Hume)의 주장에 대해 다음의 두 가지 철학적 난점을 지적한다. 첫 번째 난점은 무생물에서 나타난 생물의 최초 출현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내놓는 일이다. 생물은 그 이전에 존재하던 어떤 것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목적론적 체계를 가지고 살아간다. 두 번째 난점은 어떻게 자기생식 능력이 없는 최초의 생명 형태에서 자기생식 능력을 갖춘 생명 형태가 출현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내놓는 일이다.
그런 능력 없이 임의적인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을 통해 다양한 종이 생겨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능력을 갖춘 생명 형태가 그런 능력이 없는 생명 형태에서 맨 처음 어떻게 '진화했는지' 설명할 때 돌연변이나 자연선택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콘웨이는 이 두 가지 생물학적 현상이, 설계에 의지하지 않고 순전히 물질주의적 용어만을 사용하여 현존하는 생명 형태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의심할 만한 이유라는 결론을 내렸다. [앤터니 플루,『존재하는 신』, pp.133 ~ 134]
7-11. 이러한 사실 앞에서도 자연주의적 진화론의 입장을 견지(堅持)하기 위해서는, 생명체 자체가 현대의 최첨단 과학 지식의 총제보다도 더 뛰어난, 자가 생명 지배의 원리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 수밖에 없다. 60억 년 전부터 그러했다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첫째로 석연치 않을 뿐만 아니라, 둘째로, '원리'라는 것 자체가 이미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주의적 입장과는 자기모순을 일으킨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자연주의는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아무리 자연주의자라 하더라도 개별 사물(동물, 식물, 무생물)이 개별 사물 자체와는 구별되는 별개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뿐더러 부정할 수도 없다. (만약 이것을 부정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 물리학 자체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 된다.) 자연주의자이든 반자연주의자이든 물질적 질료(質料)보다 시간상으로 먼저 존재하는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미 자연주의자들이 자기의 주장에서 인정한 바와 같이 그 ‘원리'는 질료(質料)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주의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전부가 질료만이 아님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된다.
7-12. 한편 오늘날의 진화론은 그렇게 단선적인 자연주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생명력 내지 생명 개념을 도입하여 자연 현상을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 있는 생명력 개념을 정직한 마음으로 관찰해보면 그 '생명력'이라는 것이 하는 일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전 세계 각지에서 믿어오던) 이 세계를 운영하고 보존한다고 믿어진 ‘신'이 하는 일과 거의 동일하다.
그들은 종래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오던 모든 생명 현상을 생명력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예컨대, 이상에서 언급한 유기체의 특징들을 모두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 그 자체 혹은 생명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이 두개의 눈을 갖게 된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원근을 더 잘 인식할 수 있게 하려는 생명력의 힘 덕분이다. 혹은 이를 ‘자연의 신비' 개념을 사용해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생명력(내지 자연의 신비)은 유기체로 하여금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수단을 가지는 쪽으로 진화를 이끌며,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피로할 경우 잠에 빠지게 만든다. 또한 이 생명력은 진화의 본능에 따라 유기체로 하여금 종족을 번식하려는 습성을 갖게 한다.
이들이 말하는 생명력 내지 생명의 신비라는 것은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일까? 그들은 생명(력)이라는 자체 목적과 의도를 가진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생명 그 자체라는 개념을 창안해 내었다. 그들은 이제 이 세상의 모든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생명님'은 우리가 그의 본질과 실체적 속성을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이 세상의 모든 생명 현상을 이끄는 이 세상의 보존자(conservator)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은 성경이나 신화 등에 토대하지 않은 인간의 솔직한 관찰 방법만을 따르더라도, 생물계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생명님이든 하나님이든 둘 중 하나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에서 ‘생명’대신 ‘신’을 집어 넣어보자. 아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유신론 논증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13. 사고의 능력을 갖게 된 이래 인간은 끊임없이 이 우주가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생겨났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른바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을 가진 이들은 ‘물질과 공간은 우연히 생긴 것으로서 늘 존재해 왔지만, 그 존재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처럼 사고할 수 있는 생물은, 고정된 방식으로 움직이던 물질이 일종의 요행으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천 억분의 일의 우연으로 무언가가 태양과 부딪쳐서 행성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천 억분의 일의 우연으로 그 행성 중 하나인 지구에 생명에 필요한 화학물질과 적절한 온도가 마련됨으로써 지구에 있던 몇몇 물질들이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아주 많은 일련의 우연을 통해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우리 같은 인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종교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주의 배후에는 그 어떤 것보다 ‘정신'(mind)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 무언가는 지각과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선호하는 존재입니다. 그 무언가는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모르는 목적을 위해, 또 부분적으로는 어쨌든 자신과 닮은 존재 ― 정신을 가졌다는 정도에서만 닮았다는 뜻입니다 ― 를 만들려는 목적을 위해 이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물론 좀 더 완전한 논의를 위해 이 두 관점 사이에 있는 이른바 ‘생명력의 철학' 내지는 ’창조적 진화' 또는 ‘돌연변이적 진화'에 대해 말해야겠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은, 지구 위의 생명체를 가장 하등한 형태에서 인간으로 ‘진화시킨' 작은 변화들은 우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생명력'의 ‘분투'나 ‘목적성'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이때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말하는 ‘생명력'이 정신을 가진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 대답이 만약 ‘그렇다'라면, 이때의 ‘생명력'이라는 것은 ‘생명을 존재케 하고 그 생명이 완전해지도록 이끄는 정신'이 되는데, 이것은 기존의 종교에서 정의하던 바로 그 ‘신'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관점은 종교적 관점과 같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 정신을 가지지 않은 그 무엇이 ‘분투'하거나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므로, 이 관점은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 봅시다. 결국 이 우주에는 두 가지 관점만 존재합니다. 그런데 종교적 관점이 먼저 있었고, 유물론적 관점이 점차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는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고하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에나 이 두 관점이 있었습니다.
한 가지 더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 의미의 과학으로는 둘 중 어느 관점이 옳은지 알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학은 유용하고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 왜 존재하느냐, 과학이 관찰하는 사물들의 배후 ― 그 사물들과 다른 종류의 무언가 ― 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과학이 던질 질문이 아닙니다. 만일 ‘배후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거나, 알려지더라도 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알려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과학이 할 수 있는 진술이 아닙니다. 진정한 과학자는 대개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책에서 자기 견해에 맞는 어설픈 과학 잡동사니를 주워 모아 글을 쓰는 기자들이나 대중 작가들이 그런 말을 하지요.
결국 이것은 상식의 문제입니다. 언젠가 과학이 완전해져서 전 우주에 있는 것들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설사 그렇게 되었다 해도 “우주는 왜 존재하는?”, “우주가 지금처럼 지속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인가?”, “우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은 지금과 똑같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습니까?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pp.52 ~ 55의 표현을 내가 조금 수정함]
7-14. 알다시피, 리처드 도킨스나 대니얼 데닛과 같은 자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장 솔직하고 정직한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형이상학자들이다. 말하자면 ‘진화론'은 생물학적 탐구의 결과로 발견하게 되는 법칙이 아니라, 생물학 연구를 맨 처음 시작할 때 깔고 들어가는 전제다. 이러한 특성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세계관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은 차이가 있기에 여기서 지적하고 넘어간다.
7-15. 기독교는 ‘진화론'에는 명백히 반대하지만, ‘생물이 진화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열려 있다.
7-16. 진화론이 오늘날 생물학계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의 논리적 우수성이나 충분한 증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신(神) 개념을 배제하고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또 다시 생명님 개념을 끌어 들여오는 모순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 세계에 대한 진실이기 때문이다.
7-17. 생명은 우리 행성의 우호적인 조건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① 목표를 따르고 ② 자기복제를 하는 존재들을 만들어 내라고 물질에게 명령하는 자연법칙은 없다. …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목표 지향적이고 자기복제를 하는' 생명의 기원을 설명해 내는 만족스러운 대안은 무한한 지성을 갖춘 정신 하나뿐이다. [앤터니 플루,『존재하는 신』, pp.138 ~ 139]
8.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의심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이미' 어떤 관점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 대해 의심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문제의식을 느끼는 그 대상을, 그 대상과는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기준'에 견주어 보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지 상태에서는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문제의식은 그 이전에 어떤 기대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만 생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과 경합하는 다른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9. 개중에는 이상의 모든 논의들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왜 하필 기독교의 하나님이어야 하냐고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상의 논의들은 신, 앞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특별히 창조자와 동의어로서의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의였다.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었는가 하는 것은 역시 별개의 논의다. 정확히는, 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서야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이야기 있는 논의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자로서의 신이 충분히 긍정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9-1. 혹자는 진지한 궁금증 가운데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이 현재의 당신에게는 어떻게 작용하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이상의 사실들은 내가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다. 믿음은 믿음이기 때문에 매일 동일한 강도를 갖지 않는다. 인생이 너무도 어렵거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하지 못한 시간이 오래 될 경우, '하나님이 없는 것은 아닐까?' 혹은 '이 신앙은 다 쓸 데 없는 것 같은데?' 혹은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 없이 살까?'하는 생각이 들 때, 그러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한편으로 적극적으로는, 이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맛보고 관찰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기능을 하고 있다. 삶에 평안이 있게 하고 감사가 있게 하고 기쁨이 있게 하고, 낭만이 있게 한다. (물론 이러한 낭만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도 역사적으로 꽤 있었다.) 최근에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 하나만 이야기 하자면, 하나님은 유머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고, 귀여움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지만 이 글의 요지를 벗어나므로 생략한다.
9-2. 또한 개중에는 이상의 모든 논증을 수긍하면서도, 신이 있다면 왜 자기가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귀추법에 의하는 등의) 모호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느냐고 반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는' 신의 속성에 대한 논의다. 신의 존재와 신의 성품에 대한 문제는 다른 평면상의 논의이다. 뒤의 것을 가지고 와서 앞의 것을 흔들 수는 없다. 역시 지금까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자 개념이 충분히 개연성 있게 설명될 수 있고,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은 매우 어리석음을 밝힌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입장에서 이에 대해 답변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에 내켜하지 않는데도 명백한 증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과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you) 자체를 원하시고, 당신의 전 존재를 원하시고, 당신의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포함하는) 온 영혼을 원하신다. 당신 전부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에게는 우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이유다. 우리의 재물이나 시간이나 노력이나 수고 따위의 것들이 아니라(이런 것들은 하나님에게는 필요가 없다), 우리의 전 존재를 달라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이신 그분이 우리를 달래고 겁주고 어르고 협박하시기까지 하는 이유다. 이것이 기독교의 설명이다.
"하나님 당신이 우리를 지으셨기에,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 전까지 우리 마음은 결코 쉴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출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기Ⅰ|작성자 플란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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