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웅님의 블로그

로마서 8장 22절 ~ 23절 본문

강해설교

로마서 8장 22절 ~ 23절

하나님앞에서진실함 2016. 5. 16. 02:26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이 부분은 기독교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고 있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자주 잘못 이해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있어서 만큼은 유대교인들이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이 신음하며 하늘에서 임할 구원을 기다리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밭과 타작마당, 산천의 나무들이 모두 그런 상태에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세상은 아직 다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일부분만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지금 구원론에서 '칭의-성화-영화'를 이야기할 때, 아직 ‘영화’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정확히 이해하였던 바와 같이 온 세상이 아담의 죄로 인한 결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소와 염소, 양과 들판, 애팔래치아 산맥, 개마고원, 집 앞 정원의 개미굴 모두 죄의 결과물로 인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신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 모두 이 점에 있어서는 똑같이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자원의 결핍, 땅이 열매를 내지 않는 문제들 모두 죄의 결과물입니다. 태풍과 지진, 홍수와 가뭄도 모두 죄의 결과물입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죄의 결과물의 지배를 받게 된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살 궁리를 하기 위해 또 다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 위에 죄가 누적되고 또 그 위에 죄가 누적됩니다. 여러분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TV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도 살기 위해 죄를 지어야 하는 구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하고 반문하실 수 있겠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비참한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짓는 것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게 된 상황 그 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죄로 인해 이런 비참한 상태에 빠졌는데, 우리는 이 비참의 상태를 심화시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된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인데, 이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죄를 짓는 일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도덕적 지위와 영혼의 상태뿐만 아니라, 이 창조 세계 전체가 죄로 타락하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지금 '확실하게' 구원된 것의 범위에는 이 세계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죄로 완전하게 물들고 전복된 이 세계는 아직 회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배가 침몰하고, 암에 걸리고, 강도를 당하며, 전쟁이 벌어지고, 손을 베이는 고통들을 경험합니다.
  밥을 먹어도 영양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거나, 몸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얼굴에 이상한 반점이 생기고 자국이 날 것입니다. 몸의 특정 부위가 이상하게 부어 오르고 고름이 날 것입니다. 대상 포진이 여러분을 찾아갈 것입니다. 피부와 위에는 종양이 자리 잡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과도히 예민하게 태어날 것입니다. 쓸 데 없이 남을 경계할 것입니다. 이유 없이 두려운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또 여러분이 낳은 아이는 10살이 되어서도 이유 없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할지도 모릅니다. 아직 12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또는 사람들이 다 자신을 싫어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와 정신의 건강 문제만이 아닙니다. 신앙과 무관하게, 우리는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미움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될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느끼기에는 여러분 자녀의 목소리가 짜증난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혹은 표정이 재수없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혹은 친구들이 좋아할 정도로 충분히 활달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애지중지 기른 아이가 학교에 가서는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10살도 되기 전에,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로 인해 40살, 50살이 되어도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의심을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배우자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또 그 아이는 자기의 자녀들을 쓸데없이 통제하려는 부모가 되어서 그 자녀와의 관계에서 고통을 겪을 수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반가움의 표시로 한 동작과 표정들로 인해 미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 안에 있는 비사교적인 성격을 극복하면서까지 다른 사람들과 잘 해보려 하지만, 표정이나 동작이 어색하다는 이유로 여러분은 하찮은 사람으로 대우받을 것입니다.
  또 우리는 아무리 일해도 일터와 직장이 활짝 꽃 필수 없는 그런 저주 받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만 되면 그 이후로는 항상 행복할 것처럼 주장하는 교리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식의 전도도 잘못된 것입니다. 신자들 역시 죄로 엉망이 되어 버린 이 창조세계에서 그로 인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신음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더라도 우리는 완전히 행복하지도 않을 것이고 항상 행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이 되었고, 또 사랑하시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죽음 이후 맞게 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이 타락의 결과물로 인해 고통 받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일이 제대로 되어 가는가 싶으면 꼬이는 일이 발생할 것이고, 누군가 실수를 해서 모든 것을 망쳐 놓을 것입니다. 이제 결혼 생활이 행복하겠지 하겠지만, 타락의 영향을 여전히 받고 있는 여러분 자신의 내면과 배우자의 내면 세계로 인해 여러분의 결혼 생활이 행복할 것임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마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여러분의 결혼생활은 별로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외적인 부부들만이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보통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결혼 생활 중 언뜻언뜻 행복을 맛 보는게 고작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아무리 사랑으로 기른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방 방문을 닫고 들어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여러분에게 이유 없이 많은 것들을 바랄 것입니다. 그리고 서운해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님은 여러분의 결혼 상대자를 이유 없이 못마땅해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상사는 이유 없이 여러분을 통제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함께 어울리고 싶어하는 사람은 여러분과 어울리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과는 '급'(級)이 다르다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여전히 못 생기고 볼품 없는 외모로 인해 카페와 식당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것이며, 여러분을 그렇게 대접하고 있다는 것이 종업원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날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여러분의 상사는 여러분을 승진의 우선순위에서 제쳐둘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틀 밤을 세워 기획한 기안의 기안자 이름에는 여러분이 아니라 버젓이 상사의 이름이 적히게 될 것입니다. 밤새도록 작업을 하더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내하며 일하다 하더라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써낸 논문이 지도교수의 이름으로 학술지에 실릴 것입니다. 보험을 들었는데 그 보험사가 유령회사일 것입니다. 전셋집을 구해 들어갔는데, 그 집 주인이 채무를 다 이행하지 못해서 그 집이 경매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더라도 여전히 이런 일들이 여러분의 인생에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우리는 모든 것이 그 창조시의 모습을 상실하여 엉망이 되어버린 땅과 소나무와 흙과 바다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와 하늘과 돌과 피부와 혈관과 털과 강아지와 더불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물들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죄의 영향력이 잔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해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1장 1절  (0) 2016.05.15